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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야와 마지막 드래곤- 2021.3.10. 메가박스 목동
(영화의 주요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지 모르니 사전정보를 원치 않는 분은 유의해 주십시오)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작품의 매력에 비해서 여러모로 운이 좋지 않은 것 같다. 개봉 시기도 애매하고 세상을 둘러싼 사정들 때문인지 홍보에도 상대적으로 힘을 덜 실었던 듯 하고. 관람 후 느낀 것은 평이하되 비범하고 익숙한 듯 하면서도 매력이 넘치는, 대강 묻히기엔 아까운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저마다의 개성이 강한 디즈니 장편 가운데서도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다소 독특한 면이 있다. 다수의 작품에서 절대적인 지분을 차지하는 배경이 판타지(동화, 신화 모두 포함해서)임에도, 생태계의 상당부분을 완전히 새로 만들어낸 경우는 <보물성>처럼 SF 성격이 강한 작품들 외엔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용이 주요 캐릭터로 활약한 <뮬란>이나 살라만더 등이 출연한 <겨울왕국 2> 등의 몇몇 작품에선 환수가 조연이나 감초격에 머물렀고, 다수의 음습한 괴물이 등장하는 예론 <잠자는 미녀>와 <검은 솥>도 있었지만, 탈것으로 운용하는 생물들은 물론 화면에 소품처럼 지나가는 미물들까지 환상생물 일색으로 꾸민 건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비중과 임팩트로 치자면 <헤라클레스> 정도가 견주어볼 만 하나 그쪽도 완전한 딴세상까진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고대 인간의 세계에 신과 괴물이 공존하는 정도였으니...

반면 배경을 그려내는 방법은 지극히 현실에 근거를 둬서, 몇몇 대목은 깜짝 놀랄 정도로 사실적이다. 예를 들어 돌이 된 가족들을 생각하며 조문하듯 물 위에 꽃을 띄우는 장면은 공들여 찍은 실사라고 해도 납득할 정도. '극사실적인 소재를 사용하지만 사람의 의도가 다분히 반영된 아트'는 픽사가 아주 강한(물론 픽사는 모든 면에서 업계 최강이지만...) 부문이었는데, 나란히 놔도 될 만큼 좋다. 엉망이 된 세상으로 시작하는 도입부에서 평소보다 유난히 입자 느낌이 강하게 느껴진 건 메마른 세계관을 강조한 게 아닌가 싶으나 이건 지레짐작일 뿐이고... 눈에 띄게 화면이 자글거린다는 평들이 많던데 장면별로 느낌 차이가 있는 건 논외로 치더라도 이 작품의 필름 그레인이 유독 눈에 띄는 건 사실이다. 아날로그 촬영의 산물이 아닌 이상 일부러 적용해야 발생하는 요소라는 걸 생각하면 이유는 몰라도 의도적인 것 만은 확실하고.

하지만 역시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에 있어서 가장 도드라진 개성은 단연 인물에서 나온다. 유구한 디즈니 헤로인의 역사에서 악이나 부조리에 맞서 싸운 능동적 여성들이 적잖이 있었으되 본격적인 '투희'는 라야가 최초다. 직접 칼을 들었던 뮬란의 예가 있지만 무력 면에선 병사 1 정도의 위치였고(역대급의 킬 카운트는 지혜에 근거한 거였고... 근데 뮬란 역시 동양 캐릭터라는 점이 재밌다), 신궁에 가까운 메리다나 극적인 스케일에 걸맞는 스펙을 지닌 엘사의 경우 외려 직접적인 싸움은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이미 성소의 수호자로 인정받을 정도였던 라야는 극중 시간의 흐름과 함께 노련한 전사가 되어 멋드러지고 역동적인 연출의 지원을 담뿍 받으며 본격적인 전투를 수행하는데, 이건 치고 받는 싸움이 마우이의 몫이었던 <모아나>처럼 물리적 액션을 남성의 영역으로 유지했던 기존 작품들과 확실히 다른 지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원인이라곤 할 수 없겠지만, 유사 가족을 형성하는 조연들을 제외하면 서사의 중심에 있는 캐릭터가 거의 여성이라는 점도 특징이다. 내 호감도와는 별개로 <겨울왕국> 중 크리스토프의 극중 위치가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관객들의 예상을 헛갈리게 하기 위한 이중 삼중의 장치적 의미가 더 컸다고 생각하고 이야기가 풀릴 즈음엔 아예 역할을 들어낼 정도였어도 크게 문제가 없었던 <겨울왕국 2>로 그게 더 확실해졌다고 보는데,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에선 그걸 넘어 유의미한 역할의 남성 캐릭터를 배제하다시피 하는 데까지 간다.

그래서 아쉽게 느낀 것이 바로 큰 갈등의 원인 제공자이자 라이벌 캐릭터인 나마리의 위치다. 첫만남에서 호감을 느낀 나머지 쉽게 마음을 열었던 탓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는 건 괜찮은 전개였지만, 좀 더 애틋한 관계였다면 한층 극의 정서에 감정을 이입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미련이 남는다. 이야기의 앞뒤를 생각하면 둘의 관계를 그 이상 깊게 엮기도 쉽지 않았겠으나, 두 사람의 교감이랄까 하는 부분을 더 강하게 만들었거나 그참에 냅다 달려서 상대에 대한 호감을 넘은 연애감정까지 갔다면 클라이막스의 맞대결에 극적인 느낌이 고조될 수도 있었을텐데...라는 망상일 뿐이지만. (얄궂은 운명의 최고조에서 마침내 만난 어긋난 연인이 애증이 실린 칼을 주고받는다, 멋지잖은가!?<- 윈다리아냐;) 나마리는 히어로물로 치면 라야의 아치 에너미에 해당하는 인물임에도 실상 제대로 만난 건 단 한번뿐이었던 만큼, 악연이라는 면에선 감정적으로 크게 빠져들었던 사람과 격돌하는 쪽이 좀 더 극적이 아니었을지.

망상에 걸신들린 덕후의 뻘소리로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사실 틀린 말도 아니지만;), PC니 뭐니 하는 걸 떠나서 이런 걸 넘어가지 않는 게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디즈니'가 지키는 최소한의 선이라고 한다면 사실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오히려 요상한 데서 선을 넘었기에 하는 소리기도 하다. 작품에서 제일 불편했던, 바로 중간에 합류하는 파티원 중 하나인 노이에 대한 것이다. 말문도 채 트이지 않은 어린아이 주제에 능란함이 지나쳐 때론 징그러울 정도의 사기꾼인데, 이게 아시아 배경이니까 이런 짓도 하지...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정도 설정에 눈을 감을 정도면 디즈니의 허용치를 논하는 것도 좀 허탈하잖은가. 뭐 대단한 주장은 아니고, 한층 과감했더라면 클라이막스에 좀더 감정이 폭발하지 않았을까라든가 최초의 투희 속성에 더해 동성애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첫 작품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라는 생각도 들더라 정도의 이야기. 근데 사실 위에 적은 감정의 심화 면에서라면 나마리를 남성으로 설정하는 게 훨씬 편했을 거라 생각하니 좀 멋적기도 하다.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여느 디즈니 애니메이션 못잖게 눈이 즐거운 작품이다. 앞서 언급했던 배경의 묘사는 물론이거니와 어디까지 진화할 지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인물 연기에 더해(말해 무엇하겠는가마는, 페이셜은 이제 뛰어나다 못해 가끔 무서울 지경) 과격한 액션 또한 일품이다. 라야가 단신으로 최후의 대결장으로 걸어들어가는 장면은 마치 진지한 무협지의 클라이막스를 연상시킬 정도고, 이어지는 나마리와의 결전은 무척 역동적인 동시에 아름답다.

<뮬란> 이후 처음으로 시도되는 만큼 많은 고민과 아이디어가 들어갔을 동양 크리쳐인 시수의 표현은 상당히 만족스러운데, 일반적으로 재앙이나 역병을 동반하는 서양의 드래곤과 달리 상서로운 존재로 일견 신성마저 지니는 '용'의 차이를 잘 잡아냈다. 보기에 따라 다소 불쾌한 골짜기가 될 수 있었을 시수의 디자인도 종합적으로는 주인공과의 유대는 물론 다소 불완전한 캐릭터 속성에는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빗방울을 밟으며 공중을 뛰어다니는 모습의 미려함이라든가, 적잖이 시도된 바닷속 장면 등을 통해 익숙해졌을 법도 하지만 민물이라는 특질 때문인지 묘하게 결이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준 물속 장면도 그렇고 여러모로 인상적인 씬이 많다.

시수가 취한 인간의 형태가 초로에 가까운 중년 여성이라는 점에도 눈길이 가는데, 캐릭터의 생김새나 행동거지가 의외로 낯선 매력을 보여준다. 일행의 면면이 비교적 낯익은 실루엣과 행동패턴을 갖고 있는 것과 확연히 구분되고, 역대 어느 조연들과도 근연관계를 찾기 힘든 외모 또한 개성적이고. 예상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여느때보다 과감했던 '믿음에 기댄 자발적 희생'이 돋보인 클라이막스 장면의 경우 지금까지의 디즈니 작품이 그런 대목에 이르렀을 때쯤 어딘가 한걸음 떨어져 상황을 보는 듯 했다면 이번엔 좀더 안으로 들어가 직접 체감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연출이 좋다.

동양적인 소재에 기인한 여러 아트웍도 훌륭하고, 일말의 인간성 내지는 동물같은 느낌마저 들어낸 점에서 디즈니 사상 전무후무하지 않을까 싶은 '드룬'의 표현도 그 무기질적인 면을 잘 살렸다. 활용도를 높이고 한층 소름끼치게 다룰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 생각까진 없었을 테고... (예기치 못한 경우라면 몰라도 디즈니가 트라우마를 의도한 적은 없었을테니) 그런가 하면 평면적인 그림극으로 과거에 벌어진 일을 설명하는 도입부도 인상적이다. 내가 이런 걸 좋아하는지라 눈이 더 갔던 것도 있지만... 부가적인 설명을 본편과 사뭇 다른 느낌으로 표현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닌데, 이 부문에서 일찌기 <쿵푸 팬더> 등을 통해 탁월한 스타일을 보여줬던 드림웍스의 감각에 비견할 만한 연출이다. 아무래도 좋은 얘기지만 다소 가벼운 그림으로 엮은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의 엔드 크레딧이 한 커트로 이어지는 것도 재밌었고.

무척 만족스럽게 본지라, 진작부터 교차상영에 들어갈 정도로 미진한 흥행이 안타깝다. 좋은 환경에서 최소한 한번정돈 더 보고 싶지만 쉽지 않을 것 같다. 정석을 따라가는 이야기인 탓에 굉장한 반전이나 특이점은 없으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 시각적 성과와 화끈한 액션 가운데 독특한 색깔로 인상적인 장면들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훌륭하다. 사실 장점을 더 크게 보고 강조하긴 했지만 이 작품의 감흥을 가장 잘 요약하는 건 극중에 등장하는 음식일지도 모른다. 무척 예쁘게 표현되어 감탄을 자아내니, '근데 막상 실제로 먹으면 맛이 있긴 하겠어? 싶었던. 하지만 또 누가 알겠는가, 개봉 당시엔 밋밋하게 느껴졌던 <쿠스코? 쿠스코!>처럼 오히려 세월과 함께 꾸준히 재평가가 이루어지며 컬트적인 팬층을 갖는 작품이 될 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라푼젤>이나 <겨울왕국>처럼 단숨에 반해 폭주하듯 내리 관람하는 작품이 있듯, 시간을 두고 되새기는 동안 점점 달리 보며 매력을 발견하는 작품도 있는 법이니까.
by EST | 2021/03/16 13:28 | 영화관 2020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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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rumic71 at 2021/03/16 13:57
전 PC의 수혜 대상이지만 PC가 껄끄럽습니다. 좋게 생각해도 폭주중이고, 뭔가 의도적이라는 음모론까지 머리에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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