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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드레이서(디지털): 2008.5.14 메가박스 신촌
<스피드레이서>, 그러니까 <달려라 번개호>는 그 친숙함만큼이나 의외의 생경함이 자리잡고 있는 작품이다. 이런 류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작품들은 체험이라든가 시대의 흔적 정도로도 바꾸어 말할 수 있을 정도인데, 어떤 원체험에 가까운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는 것에 비해 제대로 접한 경험 같은 것이 생각보다 적기 때문에 생경하다는 표현을 쓴 것이다. 어린시절 공포의 대명사였던 <요괴인간>이나 동요 수준으로 자리잡고 있는 <마린보이>를, 제대로 TV에서 챙겨본 적이 있냐 하면 사실 그렇진 않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면 설명이 될까. 하긴 딱히 설명이 잘 되지 않는 걸 애써 풀려다 보면 말이 꼬이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스피드레이서>는 단지 타츠노코프로덕션의 히트작 애니메이션 자체보다는, 우리나라 공중파와 AFKN을 통해 부분부분 접한 작품에 대한 기억과 동네방네를 뛰어다니며(또는 대학 시절 MT같은데 가서 별안간 밤새 만화영화주제가를 릴레이로 불러제끼곤 할 때) 불렀던 주제가 또는 많은 사람들이 주행을 하다 발랑 뒤집어지는 기믹이 있었다고 헛갈리는 완구에 대한 기억 등이 골고루 뒤섞인 추억의 한 덩어리인 셈이다.

따라서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나 애정과는 별개로 <스피드레이서>가 헐리우드에서 영화화된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걱정과 기대가 교차하는 느낌을 받았던 게 나 하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앞서 적은 대로 이건 추억의 재정립 같은 것이니까. 그러다 예고편을 봤는데, 이게 나름 느낌이 대박이었다. 유치하고 자시고 그런 걸 떠나서, 어린 마음에 '레이싱'에 대해 어떤 기호처럼 각인됐던 몇몇 구도들, 그러니까 위 또는 옆에서 본 지극히 평면적인 자동차들이 줄지어 가는 장면의 강렬한 느낌 같은 것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영화로 펼쳐지는 데서 깜짝 놀랐달까. 한편으론 '이런 장면과 색채가 서양 사람들 눈에는 이렇게 비쳐졌고 일정 부분에선 나랑 비슷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등의 느낌이었던 것이다. 물론 마음 속 '어른의 시선'에서는 '예고편 나온 걸 보니 호오가 확실하게 갈리겠군. 그런데 아무래도 말아먹는 쪽인 것 같애'라고 중얼거리고 있었고.

언제나처럼 장황하게 이어지는 내용(클릭)

여하튼, 키취적인 느낌으로 가득한 예고편을 보면서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이거 잘 되면 꽤 재미있을 것 같은데'라는 쪽이긴 했는데, 박스오피스에서 그야말로 죽을 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어찌어찌 시간을 만들어서 한밤중에 영화를 보러 갔다. 시간대가 맞지 않아 밤 11시쯤의 상영분을 골랐는데 영화 시작 직전에 두 여성 관객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신촌 메가박스의 안락한 환경에서 혼자 앉아 영화를 보는 전대미문의 경험을 할 뻔 했었다나. 영화 쪽은 어땠느냐 하면, 정말 재미있었다. 애시당초 '<매트릭스>의 워쇼스키 형제'에 경도된 것도 아니고 그들에게 뭔가 엄청난 걸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너무너무 즐거운 관람이었다. 막판에 혼자 앉아 엔드 크레딧을 볼 때는 나지막히 주제곡까지 따라 흥얼거릴 정도였으니까.

원 캐릭터들을 꽤 잘 재현하고 있는 주인공들의 면면도 그렇고(특히 스피드는 어디서 굴러온 듣보잡이냐 하다가 '잘 보니 저거 은근히 타츠노코 얼굴이네?'라며 재미있어했다), 아예 작정하고 따라올 테면 따라와 보라는 식으로 막 나가는 화면 연출도 아슬아슬한 맛이 있어서 좋았다. <스피드레이서>에는 제대로 정신이 박힌 상업영화 감독이라면 아마도 사용하지 않을 화면 전환이나 따붙이기등이 난무하는지라, 뮤직비디오같다는 소리도 제법 나왔을 법 하다. 영화의 메인 비주얼이라 할 만한 레이싱 장면들은 그냥 사람 소스를 가지고 애니메이션 연출을 극한까지 몰아붙이자고 작정을 했는지, 질주하는 레이싱 카를 앞에 두고 배경에 캐릭터를 까는 짓 따위를 해버리는 걸 보며 이게 극장이라서 데굴데굴 구르지 못하는 게 아쉬울 지경이었다. (2차대전 쯤의 미군 코스프레 하고 나오는 레이서들이 돈상자를 보며 사악하게 웃는 아래쪽에 정면으로 달려오는 레이싱카 배치한 장면 같은 건 하모니 효과인지만 줘 버리면 영락없이 데자키 오사무 구도 아닌가)

아마 <스피드레이서>가 외면당한 건 그런 화면이 나올 거라는 게 너무나 자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뭔가 좀 진중한 걸 기대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팝콘무비다 상업물이다 전형적인 헐리웃 영화다 하면서도 은근히 무게가 있는 교훈이나 한방 역전의 묘미 같은 게 없으면 사정없이 까대는 게 요즘 추세인 것 같기도 하고. 골수 레이싱 팬이라면 실사가 아닌 CG로 마구 폭주하는 화면을 보며 실재감이 부족하다거나 진지하지 않다거나 장난감 판촉 영상같다며 고개를 저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긴 장난감 차들에 오만 코스플레이어들이 다 타고 앉아서 나중에는 차로 칼싸움까지 하는 판이니...

하지만 난 재미있어 죽겠더라. 내가 극중에 나오는 여러 코드와 숨은 소재를 죄다 알 만큼 머리에 든 게 많은 사람이라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앞서도 말했지만 <스피드레이서>에 대한 기억은 작품 자체에 대한 애정과 깊이있는 이해가 아니라 말 그대로 어린 시절의 추억이라고 뭉뚱그려 말할 만한 희미한 덩어리일 뿐이다), 아예 내키는대로 마구 질주하듯 작품을 만들면서 즐거워했을 연출자의 의도도 느껴지는 것 같고 유치뽕짝이라곤 하지만 아주 근본적인 주제를 날것스럽게 직설화법으로 말하고 있으니 아예 있는 척 하는 어중간한 작품들보다 순진해 보이더라는 거다. 다인님 평을 좀 흉내내자면 '유치뽕짝이 극한을 달려 마침내 접신의 경지에 도달한 작품'이라 할 만 하다. 이쯤되면 인정해 줘야지. 물론 사람들이 씹었던 것 처럼 그 망할놈의 초딩은 참 짜증이 났지만서도, 내가 아주 어렸을 때라면 또 저 초딩놈한테 감정을 이입하며 깔깔껠껠거렸을 거라 생각하며 좀 너그러워질 수도 있는 법 아닌가. 어설프게 정치인처럼 이슈를 만드는 심형래의 <디-워>를 보며 있는대로 씹어대고 있지만 그가 출연한 유머일번지를 보면서 배가 찢어져라 웃었던 과거까지 부인하진 않는 것 처럼 말이다.

엔터테인먼트로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 그 무대를 가지고 유혹하며 주인공의 재능을 끌어들이려 하고, 그게 뜻대로 안 되니 네깟 것이 혼자 힘으로 뭘 할 수 있을것 같냐며 비웃고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볼모로 위협하는 것이 실제의 시련으로 다가온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색으로 수놓은 화면에서 장난감같은 차들이 나와서 이리 날고 저리 뛰며 기계팔을 뻗어 칼싸움을 해 대면 그런 이야기도 덩달아 폄하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주인공의 선택지는 둘 중의 하나다. 부조리와 비리를 모른 척 하고 그 무대에 뛰어들어 성공한 광대가 돼서 끝발을 날리든가, 아니면 정면으로 싸워서 힘 있는 놈들한테 이겨버리든가. 우리가 몸 붙이고 사는 세상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고, 대개 전자를 택하면서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고 자조하거나 식솔들 얼굴을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이긴 하지만.

그래서 막판에 주인공이 골을 통과할 때, 주인공의 롤 모델이었지만 진실을 통해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왕년의 레이서나 이해관계에 의해 함께 잠시 동고동락했지만 사실은 뒤통수를 때린 레이서(비-정지훈 이야기다)나 주인공의 가족과 친구나 일절의 이해관계가 없는 중계방송의 아나운서나 서킷의 관객들이나 너나할 것 없이 다함께 '가라, 스피드!'를 외치며 열광하는 장면에 더할나위없이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함께 즐거워했던 것일게다. 평소에 맘 한구석에 미뤄뒀던 현실과의 타협이나 미혹 같은 걸 잠깐 벗어둔 채, 자신들이 했던 찌질한 일들은 잊어버렸는지 웃고 흥분하며 주인공을 연호하는 극중 캐릭터들과 함께 주인공의 우승에 열광하고 환호하는 클라이막스의 한순간. <스피드레이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작품이었다.
by EST_ | 2008/10/21 17:45 | 영화관 2000 | 트랙백(3)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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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가고일 at 2008/10/21 18:08
그렇게 재미있게 보고 나왔음에도 세상의 코드는 이미 이걸 따라가기에는 너무 현대화되버린거란 생각을 하며 슬퍼지는 작품이더군요...
Commented by 로오나 at 2008/10/21 20:08
저도 재밌어 죽었습니다. 예고편을 볼땐 전혀 기대를 안했는데 외려 직접 보고 나서 뻑간 케이스죠. 하하하.
Commented by DAIN at 2008/10/21 21:20
정말로 노래 가사 그대로 '정의의 깃발들고 세계 끝까지~'인 영화인데 말이죠.
Commented by 잠본이 at 2008/10/21 22:04
개인적으론 즐거웠지만 일반대중이 환호할 물건은 절대 아니겠다 싶었죠 OTL
(워쇼스키 이놈들... 오덕질도 좀 적당히 할것이지 OTL)
Commented by kenshiro at 2008/10/21 22:54
저도 처음부터 끝까지 줄창 신나게 봤습니다. 애초에 이런 작품에 쓸데없는 건 바라지 않았거든요. ^^;

...그나저나 이동네 팜플렛에 안노 히데아키의 극찬 코멘트가 있는 걸 보면 역시 덕후는 덕후끼리 통한다랄까요(읍읍읍)
Commented by EST_ at 2008/10/22 01:03
가고일// 영화 보면서 내내 '네까짓 시원찮은 그림쟁이 나부랑이들이 창작이랍시고 뭐 할 수나 있겠어? 회사가 받쳐주든지 돈푼이라도 쥐어주지 않으면 배나 곯을 것들이'라고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지요 흐흐.

로오나// 저도 막판엔 에라 될대로 되라 하면서 극중 관객들과 함께 스피드를 연호하고 있었답니다. 아주 즐거웠어요.

DAIN// 동감입니다. 어중간하게 꼬고 무게잡느니 아예 이렇게 직설적으로 나가는 것도 좋은데 말이지요. 사람들이 아무래도 갈수록 자신이 생각없이 그저 즐겁게 영화 봤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 같아요.

잠본이// 그러니까 한마디로 <스피드레이서>에 대한 제 열광은 오덕도의 커밍아웃일지도 모른다는 말씀!? OTL <킹콩>이랑은 또 달라서 사실 캐릭터의 외모를 제외한 원작 재현도나 네타 같은 건 잘 모르겠더라구요. 그래도 잠본님 말씀대로 '대중이 두루 좋아하진 않겠구나 싶긴 했습니다만...

kenshiro// 제가 보기엔 쓸데없는 걸 바라는 게 아니라 바라는 척 하는 것 같아요 하흐흐. 덕후는 덕후끼리 통한다는 말씀은 아무래도 맞는 듯. 지인 말로는 그쪽으로 통하면 열심히 대화해 놓고 생각해보니 서로 말이 통하지 않더라라는 얘기도 있던걸요.
Commented by 렉스 at 2008/10/22 09:45
팬보이질(킹콩 / 슈퍼맨 리턴즈)도 오덕질(스피드 레이서)도 그저 부러울 뿐 ㅜ.ㅠ)[둘의 차이는?;;]
Commented by EST_ at 2008/10/22 10:07
렉스// 맞다, 오덕질 하면 슈퍼맨 리턴즈도 절대 밀리지 않는 작품이었죠!

... 그나저나 여전히 렉스님 포스트에 트랙백하면 스팸처리가 돼서 튕겨나네요 ㅠ ㅠ
Commented by 렉스 at 2008/10/22 10:09
매번 제가 복구는 하지만, 그때마다 미안함이 사라지진 않죠 ㅜ.ㅠ)
스팸 막기 설정 이후 항상 이래요. 아악.
Commented by EST_ at 2008/10/22 17:39
아무래도 제가 스팸처럼 인식될만한 무언가를 은연중에 쓰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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