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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린의 아이들- J.R.R. 톨킨
가운데땅 관련 서적들을 꾸준히 발간, 보완하고 있는 '씨앗을 뿌리는 사람'에서 신간 <후린의 아이들>이 나왔다. J.R.R.톨킨이 책을 온전히 엮어낸 것은 아니고, <실마릴리온>처럼 그의 유고를 아들인 크리스토퍼 톨킨이 엮은 책이다. 가운데땅의 역사 전반을 아우르는 <실마릴리온>에도 당연히 이 이야기가 실려있는데, 씨앗판 양장본 기준으로 약 50여페이지 정도 분량이다. <반지의 제왕>에 해당하는 부분의 약 두배 정도에 달하는지라 <실마리리온> 안에서도 밀도가 높고 한층 구체적으로 묘사된 부분이기도 하다. 비중상으로는 '베렌과 루시엔' 이야기와 비슷한 정도의 존재감을 갖는다.

주인공들이 겪는 고초와 역경, 그리고 그들이 크건 작건 가운데땅의 여러 존재들과 엮이고 얽히면서 한 시대와 한 왕국을 역사 속에 묻어버리기도 하는 등의 느낌은 비슷하지만, '베렌과 루시엔'의 마무리가 어떤 고난 끝의 안식이라는 느낌이라면 이 <후린의 아이들>은 한마디로 처연함 그 자체라는 느낌이다. 창조의 영광과 환희의 이면에 악의 태동이나 배신과 음모 또한 빛과 그림자처럼 배치되어 있는 가운데땅이니만큼 파생되어 나올 만한 이야기들은 정말 많지만, 아마 극적이고도 허망한 쓸쓸함이라면 <후린의 아이들>에 필적할 만한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시작부터가 요정과 인간의 동맹군이 모르고스의 검은 군대에게 처절하게 패배하고 요정왕 핑곤과 그 왕국이 사라지는 '한없는 눈물의 전투'인데다 마지막은 주인공 대부분의 쓸쓸한 최후로 마무리되는 이야기다보니 당연한 것이겠으나, 주인공들의 행보와 운명을 보고 있자면 그런 감흥은 한층 더해만 간다.

예전에 '실마릴 문답'을 작성하면서 '얄미워서 한대 때려주고 싶은 인물'로 이 이야기의 실질적 주인공인 투린을 꼽은 적이 있다. 이유인즉슨 '가운데땅에서 가장 강력한 민폐를 끼치는 인물'이라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강인한 생명력과 카리스마는 갖고 있으나 결코 좋은 사람이라고 하긴 어려운 성격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주인공을 애써 고귀하거나 아름답기만 한 사람으로 묘사하지 않고, 품격은 갖췄으되 다혈질이고 오만한 구석도 많은 사람으로 그려내고 있어서, 참으로 척박한 그의 운명을 지켜보며 책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그를 사랑하거나 그와 엮인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흘러가고 또 그것이 나중에 얼마나 큰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지켜보는 것도 이 책에서 받을 수 있는 감흥들이겠지만, 역시 절정은 동생인 니에노르와의 관계가 운명에 의해 비틀리고 꼬이다 기구한 파국을 맞이하는 과정일 것이다. 마치 고대의 비극을 만나는 듯한 기분이랄까.

책 표지와 본문 중간중간에 쓰인 알란 리의 그림과도 아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개인적으로 알란 리는 화려한 여름숲보다는 황폐한 겨울숲, 꽃나무보다는 바위... 라는 느낌을 좀 갖고 있는데, 이야기의 처연하고 황량한 느낌에 한층 더 힘을 실어주는 듯한 느낌이다. 판형 외의 덩치만으로 치자면 <실마릴리온>과 별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장정에 살짝 거품이 들어간 감이 없지 않으나, 양장본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책의 무게가 가볍긴 하다. 다만 가볍다곤 해도 들고 다니면서 읽기를(난 그렇게 읽었지만) 권하긴 어려울 듯 하고, <반지의 제왕>, <호빗>, <실마릴리온>처럼 문고본으로 다시 나와주길 바라는 게 좋을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톨킨에 대해 감탄하게 되는 것이, <실마릴리온>에 수록된 이야기들만 가지고도 이런 정도 분량의 이야기가 얼마든지 나올 만한 세상을 엮어놓았다는 점이다. 참 뻔한 표현이긴 하지만서도 정말 한 사람이 일궈낸 세상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다.

(J.R.R.톨킨 지음/ 크리스토퍼 톨킨 엮음/ 알란 리 그림/ 김보원 옮김/ 씨앗을 뿌리는 사람)
by EST_ | 2008/07/31 02:59 | 서적/미디어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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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ZAKURER™ at 2008/07/31 10:39
조금 엉뚱한 이야기지만......
저도 십수 년 전 그 무지막지한 날림 번역으로 가락지 대빵(...)하고 실마릴리온을 탐독했었는데...톨킨 세계관을 즐겨볼까 하는 찰나에 MG 건플라가 나와서 바로 UC월드로 고고씽해버렸기에 "세계관 놀이면 톨킨 월드나 UC월드나 그게 그건데 이왕이면 화약 냄새!" 하며 모르는 체 하고 있답니다.
실은 뇌 용량 부족 때문 T.T

씨앗~의 톨킨 월드 서적은 번역에 상당히 공을 들이고 그만큼 평이 좋은 듯 하던데 언젠가 시간을 내서 싸그리 음미해볼 시간을 내봐야겠습니다.
Commented by 월광토끼 at 2008/07/31 15:56
애초 후린이 모르고스의 미움을 사서, 후린을 비뚫어지게 만든게 모든 것의 원인.
투람바르 가문은 그리 콩가루 집안이 되어버렸으니 -_-

후린의 아이들 원전으로 읽은 것도 벌써 1년 전 일이라서 헷갈리는데
그... 투린이 친구로 사귀었던 그 남자 엘프이름이 뭐였죠?
그리고 그 엘프의 칼로 투린이 목숨을 끊잖아요. 그 저주받은 검 이름은 또 뭐였죠?
지금 옆에 책은 없는데 기억은 안나고;;
Commented by EST_ at 2008/07/31 16:21
ZAKURER™// 화이트스네이크의 앨범 자켓을 가져다 쓴 다솜판 <실마릴리온>이겠군요. 세계관 놀이라면 정말 톨킨만한 작가가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저도 뇌 용량 부족으로 늘 허덕이고 있습니다 크흐흐.

월광토끼// 하지만 그게 후린의 업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그 상황에서 모르고스에게 굴복했다면 과연 그 집안이 평온했을 리도 없고...

투린을 사랑했지만 결국 투린의 손에 목숨을 잃은 엘프라면 '센활' 벨레그 쿠살리온입니다. 투린의 검은 칼 이름은 구르상이구요. 구르상은 투린이 붙인 이름이고 원래 이름이 있는데 갑자기 쓰려니 기억이... 아니 이 가운데땅이라는 데는 대체 사람도 사람이지만 칼 나부랑이까지 이름이 두세개씩 있으니 원;;;
Commented by ZAKURER™ at 2008/07/31 16:22
찾아보니까 다솜판 맞네요. 악명(그 땐 그런 줄도 몰랐지만...)에도 아랑곳없이 그거 다 읽었던 저도 용자려나요? ^^
Commented by EST_ at 2008/08/01 04:12
ZAKURER™// 전 사실 그나마도 어렵사리 구해 고맙게 읽었으니 이런 말 할 자격은 없습니다만, 모 처에 갔더니 어떤 분들은 다솜판을 가리켜 '걸레릴리온'이라고들 하시더군요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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