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의 오락영화라 할 만한 걸출한 물건이 나오는가 하면 언제 그런 영화가 만들어졌냐는 듯이 스리슬쩍 잊혀진 것들도 만들어지는 가운데, 어느새 슈퍼히어로 장르는 헐리웃 블록버스터의 큰 축을 담당하는 소재가 되었다. 최근 영화화된 추세를 보면 DC코믹스보다는 단연 마블 코믹스 쪽이 숫적 우세를 자랑하는 가운데, 드디어 마블의 유명 히어로 중 하나인 아이언맨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내게 있어서 아이언맨은 익숙하다면 익숙하나 그렇다고 잘 아는 캐릭터냐 하면 그것도 아닌, 좀 애매한 캐릭터이긴 하다. 이 캐릭터를 처음 만난 건 중학생 때 오락실에 있었던 <캡틴 아메리카>라는 게임을 통해서였고, (4인 동시 플레이가 가능했던 게임으로 캡틴 아메리카, 비전, 호크아이, 그리고 아이언맨이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한참 뒤에 나온 캡콤의 관련 게임들을 통해 약간의 배경 스토리를 알게 된 후 모 홈페이지의 자료 등을 통해 읽은 것들이 전부니까.
아무튼 익히 잘 알고 있는 내용이라면 아이언맨으로 거듭나는 주인공 토니 스타크는 기업 총수로 상당한 재력가이며, 스스로 만든 아머 수트를 통해 히어로가 된다는 정도 외에 잡다한 주변 이야기나 인물들의 간략한 상관 관계 정도이다. 예고편을 보고 상당히 달아올라 있었으되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사전 지식이 그렇게 많지 않은 상태에서 본 영화인지라, 어떤 의미에선 영화를 곧이곧대로 즐길 수 있는 여건이긴 했다.
12세 관람가 등급이고 표현 수위가 높지 않다고 해서 폭력성이나 어른들의 연애에 관한 분위기가 결코 부드럽지만은 않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경쾌하고 즐겁다. 마블 코믹스에서 가장 강력한 재력을 자랑하는 기업의 CEO이니만큼 "배트맨" 브루스 웨인과 자주 비교가 되는 인물이긴 한데, 부모님을 살해당한 뒤 그 트라우마로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어둠의 기사로 거듭난 배트맨에 비해 이쪽은 상대적으로 밝다고 해야 하나... 조실부모한 점은 브루스 웨인과 같지만, 오히려 사고의 빌미를 제공한 브레이크 제작 회사를 인수해서 제품을 개량, 사고율을 떨어뜨렸다는 뒷이야기를 알고 보면, 단순히 부자에다 스스로 만든 장비를 통해 히어로 노릇을 한다는 점 때문에 비슷하다고 묶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그런데 예전에 들은 이야기로 코믹스 세계에서 제일 부자는 렉스 루터라고 들은 것 같은데 최근 글을 보니 토니 스타크가 1위라는 것 같아서 좀 헛갈린다)
미리니름 방지 차원에서 일단 한번 가린, 이어지는 내용(클릭)수십년 동안 쌓여온 원작판의 이야기들은 별개로 치고 적어도 영화판에선 아주 경쾌하게 풀리는 모습에 호감이 가는데, 솔직히 스토리상으로 보면 토니 스타크는 참 재수없는 인간이다.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보이며 젊은 나이에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고 군수산업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등 재력과 재능도 출중한 데다, 그런 재력을 이용해서 온갖 여성편력과 갖가지 취미(평생 장난감을 손에서 놓지 않는 남정네들의 특성상 억만장자의 취미라는 건 그저 부럽기만 할 뿐이다)생활을 즐기며 적당히 세상에 자신을 어필하는 등...
한마디로 요약하면 '은수저 물고 태어난 엄마친구아들'이라는 것인데, 그거야 그냥 부럽고 얄미울 따름이지만 사회적인 행동 면을 보면 꽤나 웃긴다. 사실 이게 진지한 영화였다면 '자기 회사에서 만든 무기들이 자국을 위태롭게 하고 무고한 인명을 해치는 현실'을 목도하고 각성해서 히어로로 거듭난다니, 세상에 어른씩이나 돼서 그런걸 전혀 예상 못하고 무기 만들어 팔고 있었단 얘기 아닌가. 그런 고로 영화 중반에 이라크로 날아가 자신이 만든 무기들을 파괴하고 민간인들을 구해주는 장면에서는 액션의 쾌감과는 별개로 '병 주고 약 주고 앉았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이 부분에서 테러단체에 의해 큰 봉변을 당할 뻔한 부자가 끌어안고 아이언맨을 쳐다보는 장면 같은 데야말로 진짜 밥맛 떨어지는 전형적 미국 만세 씬임에도 불구하고 '병 주고 약 주고 앉았네'라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덜 느끼하게 느껴지는 신기한 경험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들을 딱히 삐딱하게 보게 되진 않는 것이, 일련의 국제정세나 다소간의 차별적 면모를 소재로 차용하곤 있으되 주인공을 애써 미화하고 미국 만세를 외친다거나 하지 않는 데서 기인한 듯 싶다. 때때로 낄낄거리며 억만장자 히어로의 개인적 호사와 돌출행동, 그리고 갈등의 해소 과정을 지켜보면 되는 영화인 것이다. 그 모든 어설픔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본적으로 많은 남자들의 로망이라고 할 만한 값비싼 장난감에 둘러싸여 있으며, 그것을 이용해서 히어로로 다시 태어나고 악당들을 응징하니 어찌 그를 재수없는 인간이라고 매도할 것인가. (방사선에 쏘이거나 초능력을 지닌 돌연변이로 태어나는 것 만큼이나 가능성은 떨어지지만 그나마 쬐금이라도 현실적으로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캐릭터 아닌가)
주연을 맡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연기력의 소유자이기도 하고, 한때 심한 부침을 겪은 전력이 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매우 배역을 즐기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전체적으로 살짝살짝 앞뒤를 비틀거나 주거니 받거니 하는 유머들이 잘 녹아들어 있는 극중 분위기도 그와 잘 맞는 것은 물론이고, 그런 코드들을 얄팍하지 않게 표현한 것도 장점이다. 영민하면서도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불안정함을 지닌 동시에, 날카롭기도 하면서 어린아이같이 뚱한 표정 등 다채로운 모습을 가진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한 것에 아주 호감이 간다. (난 특히 이양반 목소리가 아주 마음에 든다)
서글서글하니 매력적인 조연들도 영화의 즐거움에 일조한다. 일단 토니 스타크의 무적 비서인 버지니아 "페퍼" 포츠는 귀네스 펠트로가 맡았는데, 주인공과의 관계가 묘한 선을 타고 있는 점이 아주 좋다. 어떤 식으로든 궁합이 잘 맞는 조합이다 보니 살짝 로맨스 분위기를 타는 듯한 장면도 비추긴 하는데, 흔한 연애 노선으로 귀결되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관계를 유지하는 점이 매력적이다. 서로 알 것 다 알고 완만하게 씹을 것들 잘 씹어 주고 가끔은 서로의 새로운 모습에 살짝 놀라기도 하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사실 페퍼의 존재는 매력적인 이성상이라기보다는 큰누나나 어머니 같은 느낌마저 든다.
원작에 대해 살짝 귀동냥을 해 보니 흡사 제임스 본드와 머니페니의 관계 만큼이나 화학반응은 없었다고 하던데, 그런 사실과는 별개로 매력적인 캐릭터라는 점은 틀림없다. 이건 귀네스 펠트로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는데, 그 미묘한 관계를 적절히 잘 풀어내면서도 특유의 매력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동안 적잖게 스크린을 통해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귀엽다!'고 생각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나 뭐라나. 막판에 이리저리 도망치는 장면을 보면 매우 급한 와중에도 그저 큰 걸음으로 총총 움직일 뿐인데 그게 또 아주 묘하게 재미있다. 저런 캐릭터가 현실에 존재한다면 틀림없이 저렇게 움직일 거야, 뭐 그런 느낌마저 들었다.
가장 큰 악의 축을 떠안게 된 오베디아 스탠 역을 제프 브리지스가 맡은 건 아주 의외였는데, 실은 두세번째 예고편 나올 때까지도 그였다는 걸 전혀 몰랐다. 머리를 밀고 덥수룩하니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등장하는 그는, 겉으로만 봐선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풍채 좋은 야심가 늙은이(또는 나름 전형적이랄 수 있는 나쁜 아버지상) 역을 아주 매력적으로 연기한다.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요소들을 냉정하게 제거하고 신속한 움직임을 보이며 주인공들을 위기에 몰아넣는 마지막까지도, 그저 캐릭터의 한 명으로 인식될 뿐이지 '저런 나쁜놈'이라든가 '어떻게 저럴 수가!'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 소소한 일상사나 느물느물한 모습들이 은연중에 극중에 녹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피랍 상태에서 풀려난 토니를 맞아들이며 "치즈버거가 땡겼구만. 근데 내건?"이라고 말을 건네는 모습이나 아크 원자로를 보여주지 않는 토니에게 "그럼 피자는 먹을 생각 하지 마. 두쪽만 가져가!(이거 묘하게 구체적이어서 아주 재미있었다)"라고 외치는 장면 등이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엄청난 일을 저질러 놓고도 주인공이랑 태연자약 농담 따먹기를 즐길 것만 같은 느낌의 캐릭터랄까. 초반 아포지 상 시상식에서 타임지 표지에 등장한 포트레이트가 걸작이었다.
테렌스 하워드가 연기한 제임스 로드 또한 흥미로운 캐릭터로, 토니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며 위기의 순간에 그를 구해내기도 한다. 다만 실버스푼 엄친아라는 건 상당히 까탈스러운 존재라서, 친구관계이면서도 기실 치닥거리를 하기 바쁜 캐릭터. 중요한 스케쥴에 세시간이나 늦은 토니에게 삐져서 입이 이만큼 나와 있다가 잠시 후에 사케 병을 들고 궁시렁거리는 장면이 그의 캐릭터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은 한 화면에서 연결되는 스튜어디스들을 보며 속으로 혼자 너무 웃어서... 아 뭐랄까 정말 생뚱맞다고 해야 하나 천연덕스럽다고 해야 하나 싶은 뻔뻔한 분위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웃겼다)
그가 마크2 수트를 보며 약간 아쉬운 듯 "다음 기회에"를 되뇌이는 장면에선 나중에 워머신의 등장을 암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흥미로웠는데, 내가 잘 몰라서 그렇지 아이언맨 뿐만 아니라 마블 코믹스 전반에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손뼉을 칠 만한 요소들을 상당히 많이, 잘 녹여놓은 듯 하다. 초반 토니를 납치한 테러 집단 이름이 '텐 링'이라는 점도 그렇고(아이언맨의 가장 중요한 적이라고 하는 '만다린'이 가진 힘의 원천은 열 손가락에 낀 특수한 반지), 엔드 크레딧이 모두 올라간 다음 등장하는 문제의 그분이 '어벤저스'를 언급하는 부분도 그렇다.
영화의 만듦새는 매우 마음에 든다. ILM과 오퍼니지 등이 참여해서 만든 특수효과 장면들도 매우 만족스러웠고, 한 편에서 벌써 세번이나 진화 과정을 거친 아머 수트의 디자인도 아주 좋다. (등신대 수트의 제작은 스탠 윈스턴 프로덕션에서 맡은 듯) 아머 수트로 대변되는 메카닉 요소의 표현에 있어선
<트랜스포머>의 흥행으로 한창 올라간 사람들의 눈높이에도 전혀 꿇리지 않을만큼 밀도도 높다. 단 아무래도 조금이나마 현실성을 부여해야 했는지, 마크 1의 생김새가 기대했던 대로 후기 다다이즘(DP에서 본 어느 분의 표현인데 생각할수록 최고다)의 꼴을 하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 좀 아쉽긴 하지만. 영화 전반에 걸쳐 큰 스케일의 액션 장면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와 수트 제작의 과정이 결코 지루하지 않은데다, 일단 화끈해야 할 부분에선 화끈하게 속도감을 내 주었기 때문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관람했다. 오베디아가 만든 아머 수트 '아이언몽거'와 대치하는 클라이막스 부분에선 중학 시절 인상깊게 보았던
<로보캅>을 떠올라서 왠지 좋았다. (들어보니 감독이 실제로 그 부분을 염두에 뒀다는 모양이다) 거대한 철깡통과 잘 빠진 알미늄 캔이 싸우는 듯한 질감과 덩치의 대비가 ED-209와 머피의 대결 장면을 연상케 했기 때문일 것이다.
<스파이더맨>이나 <엑스맨> 시리즈같은 인기 흥행작이 될 것인지, 아니면 <데어데블>이나 <판타스틱 4> 내지는 <헐크>처럼 고만고만한 인지도로 남을 것인지, 그도 아니면 <엘렉트라>나 <고스트 라이더>처럼 부진한 작품으로 기억될 것인지. 개인적인 감상과 현재 분위기를 봐선 첫번째 경우가 될 것 같은 느낌이 아주 강하다. 부디 속편을 통해 이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래본다.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인크레더블 헐크>에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토니 스타크로 카메오 출연한다고 하고, 단순히 속편 뿐만이 아니라 뭔가 잔뜩 몰려올 것 같은 분위기로 가득하던데, 과연 마블이 직접 스튜디오의 이름을 걸고 뛰어들어 프랜차이즈에 간여하기 시작한 성과가, 어떤 결과로 다가올 지 은근히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