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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 시리즈의 작명 센스
추운 날씨 때문에 자전거 출퇴근을 일단 접어둔 1월 한달. 출퇴근길 지하철을 이용해서, 작년 말에 완간된 해리포터 시리즈를 처음부터 다시 한번 복습했습니다. 되풀이해 읽으면서도 꽤 즐거웠고, 몇몇 대목에선 꽤 오래전부터 복선을 깔아놓거나 설정상의 여지를 만들어 놓은 부분들이 보여서 아주 흥미로웠어요. 구석구석 치밀하게 읽었다기보다는 술렁술렁 빠르게 다시 읽어나가긴 했는데, 의외로 구석구석에서 신화나 전설 냄새가 꽤 나더라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뭐 EST가 그리스 신화 박돌희라든가 영화에서 자주 마주치는 조연들 전력을 들이파 보며 즐거워한다든가 하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니 이런 냄새를 맡고 좋아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겠죠. 그래서 당장 생각나는 것들로 잠깐 정리를 좀 해봤습니다.

- 헤르미온느 그레인저: 일각에선 영화에서의 발음인 허마이오니(블로그를 돌다 보면 뒤에 '~땅' 또는 '하아하아' 등의 무언가가 따라붙곤 합니다만)라는 어감이 더 사랑받는 본편의 헤로인이죠. 철자대로 신화에 적용하면 헤르미오네. 트로이 전쟁의 불씨가 되었던 절세미녀 헬레네와 메넬라오스 사이에서 태어난 딸 이름입니다.

- 미네르바 맥고나걸: 맥고나걸 교수의 풀 네임은 미네르바 맥고나걸로, 미네르바는 아테나 여신의 로마식 이름이지요. 아테나가 총애한 새는 올빼미였는데, 해리포터의 마법사 세계에서 부엉이나 올빼미들이 열심히 편지를 배달하던 걸 생각해보면 재미있습니다.

- 세베루스 스네이프: 이건 사실 신화랑은 좀 다른 얘기인데, 로마 황제의 이름 중에 세베루스가 있네요. 하층민 출신으로 황제 자리에 오른 사람이라고 합니다. 왠지 스네이프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 맞물리는 것도 같네요.

- 사이빌 트릴로니: 트릴로니는 형편없는 수업에 불길한 예언으로 일관해서 주인공들을 힘빠지게 만들지만, 어쩌다 그분이 오시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결정적인 예언을 토해내곤 하는 사람이죠. 사이빌은 아마도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예언을 했던 무녀 시뷜레에서 기인한 이름이라고 생각되는데, 시뷜레 역시 대지의 틈에서 나오는 일종의 유황 가스를 마시고 무아지경에서 신탁을 전하는 대행자입니다. (델포이는 아니었지만 영화 <300>에서 이런 모티브를 이용해서 아주 인상적인 장면을 만들었습니다. 한동안 신탁녀라고 관심을 좀 끌었었죠)좀더 흥미로운 것은 트릴로니가 예언으로 유명한 카산드라 트릴로니의 자손이라고 나오는데, 이름의 모티브가 되었을 카산드라는 아폴론으로부터 예언의 능력을 받았으나 사랑을 허락하지 않은 탓에 설득의 능력을 빼앗긴 트로이의 공주입니다. 죽을때까지 예언은 하되 누구 하나 귀를 기울이지 않는 비운의 예언자였기에 트로이 멸망을 예견했지만 당연히 먹혀들지 않았고, 트로이 멸망 후 아가멤논의 전리품이 되어 함께 돌아가서는 그나마도 남편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 정부에 의해 결국 생을 마감하는 가련한 운명의 소유자이기도 했죠.

- 리무스 루핀: 리무스... 는 레무스, 그러니까 늑대 젖을 먹고 자라 로마의 건국 시조가 되었다는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 중 한 명이 이름을 따 온 것 같습니다. 루핀은 늑대인간이니까 자연스럽게 매치가 되죠. 늑대랑 관련된 이름으로는 시리즈 후반에 등장하는 사악한 늑대인간 '펜리 그레이백'이 있는데, 아마 이 친구는 북구 신화의 늑대 펜리르(또는 펜리스라고 쓰는 책도 있더군요)에서 따 오지 않았을까 합니다. 사실 이 이름은 <사자와 마녀와 옷장>에서도 흰 마녀의 친위대장 늑대 이름으로 인용됐지요.

- 아구스 필치: 맥고나걸 교수님의 일갈에 따르면 '사반세기동안 호그와트를 들쑤시고 다녔던' 관리인인 셈인데, 그의 이름은 백개의 눈을 가진 거인 아르고스에서 따 온 모양입니다. 고양이 노리스 부인과 함께 학생들의 일탈과 밤 나들이를 적발하는 데 혈안이 되어 주인공들에게도 상당한 위협이 되었던 그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수긍이 가는 작명입니다. 시앗이라면 일단 도끼눈을 뜨고 파멸시키는 것도 마다않는 헤라 여신이, 암소로 변한 이오를 제우스에게서 반강제로 빼앗다시피 한 후 감시를 맡겼던 것이 바로 아르고스거든요. 백개 중 하나는 자는 동안에도 절대 감지 않았다고 합니다만 헤르메스의 피리(시링크스)연주에 취해 결국 백개의 눈을 모두 감자마자 바로 목이 떨어졌습니다.

- 파바티 패틸: 패틸 자매는 쌍동이로, 소소한 일들로 주인공들과 꽤 엮였던 친구들이죠. 덤블도어의 군대에도 참가했었던 파바티의 이름은 힌두교가 어원인 듯 합니다. 시바의 아내이자 자비의 여신인 파르바티에서 온 것 같아요. <해리포터와 불의 잔>의 파티 장면에서 입었던 인도 전통의상을 생각해보면 이것도 확신범.^^

- 퀴리누스 퀴렐: 1편에서 볼드모트의 숙주(!) 노릇을 했던 퀴렐 교수의 풀 네임은 퀴리누스 퀴렐. 퀴리누스를 찾아보면 로마의 전쟁신으로 훗날 로물루스와 동일시 되었다고 합니다. 소심하고 뭔가에 쫒기는 듯한 그 모습은 전쟁신의 이름과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2년 후 그가 맡았던 어둠의 방어술 과목을 쌍동이 형제인 레무스(리무스: 루핀)가 맡게 된다는 점은 확실히 흥미롭군요.

- 퍼시 위즐리: 돌아온 탕자 퍼시 위즐리. 퍼시는 퍼시발의 별칭이랍니다. 원탁의 기사 중 한 명으로 성배를 찾아낸 장본인이고, 제가 가장 흥미롭게 본 아더왕 영화인 <엑스칼리버>에서 아주 인상적인 모습으로 나왔었죠. 그러고 보니 아버지 이름은 아서(Arthur) 위즐리로군요!

- 드레이코 말포이: 포터의 숙적이자 가장 얄미운 캐릭터지만 어쩐지 미워할 수만은 없는 말포이의 이름은 밤하늘의 용자리가 어원인 모양입니다. 신화상에서는 헤스페리데스 3자매의 황금 사과를 지키는 용 라돈에 해당된다는군요. (헤라클레스의 11번째 위업에 등장합니다. 머리가 100개 달린 놈이니만큼 상대하기 버거운지라 아틀라스를 꼬셔서 대신 사과를 가져오게 시키죠) 마지막 챕터인 '19년 후'에 잠깐 가족을 데리고 나타나는데, 론의 대사에 따르면 아들 이름은 스콜피우스. 다름아닌 전갈자리입니다. 아버지는 헤라클레스, 아들은 오리온이랑 엮였군요.

- 포모나 스프라우트: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나오지만 꽤나 후덕한 인상으로 기억되는 스프라우트 교수도 어딘가 신뢰가 가는 사람 중의 한 명이었지요. 그리스 신화에 같은 이름을 가진 포모나라는 님프가 나옵니다. 계절의 신 베르툼누스가 그녀를 마음에 두고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서 결국 사랑을 얻어냅니다만, 원래는 남자와 연애는 안중에 없고 오로지 정원을 가꾸고 식물을 돌보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님프였습니다. 약초학 담당 교수로는 제격인 이름인 셈이죠.


본편에 등장하거나 혹은 등장하지 않는 많은 환상생물들 역시 신화나 민담 등에서 따온 것들이 많고 이밖에도 되짚어 보면 이것저것 많이 있을 텐데, 자기 전에 머리 말리면서 잠깐 정리해 본 건 이정도입니다. 잡스러운 데 관심이 많으면 별 소소한 데서 다 재미를 찾게 되는 게, 때론 즐겁습니다.
by EST_ | 2008/02/01 01:36 | 서적/미디어 | 트랙백 | 핑백(1) | 덧글(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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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고홍 at 2008/02/01 04:02
대부분 이름은 라틴어에서. 등장인물들 과거나 성격, 하는 일등을 절묘하게 맞췄더구만여. 영문판 위키피댜 해리포러 페이지에 보면 이름이 어디서 유래되었는가(혹은 어디서 유래되었으까)까지 상세하게 나와있어여. 참고로 레무스는 라틴어로 걍 늑대. 시리우스는 개 등등등. 그나저나 난 루나라브굿양이 최고야!
Commented by lchocobo at 2008/02/01 08:30
다른건 잘 몰랐고 파(르)바티 정도만 알고 있었습니다만....의외로 꽤 많은 부분을 따왔군요.
Commented by 나이브스 at 2008/02/01 09:13
꽤 그런거 있습니다.

신화나 다른 것에 모티부를 삼아 캐릭터 성격과 비슷한 이름을 만드는...
Commented by 백탄왕 at 2008/02/01 10:16
아..
박학다식한 형님이시다.

부끄부끄.
Commented by EST_ at 2008/02/01 10:59
고홍// 으웃 위키페디아! 레무스가 그냥 늑대인줄은 몰랐네용. 그럼 로물루스는 뭐지? (승냥인가?)

lchocobo// 읽다 보니 생각보다 눈에 많이 들어와서 나중에 한번 적어봐야지 했더랬답니다. 아마 구석구석을 보면 훨씬 더 많을거예요.

나이브스// 아무래도 서양 문화권이 성경과 희랍 신화에서 큰 영향을 받았으니까요. ^^

백탄왕// 에잇 무슨; 박학다식이 아니고 잡스런 것만 하나가득 관심쓰며 산다는 걸까나 ㅠ ㅠ
Commented by 배길수 at 2008/02/01 11:34
저걸 보니 생각나는데 가톨릭 성인 명부에서 따서 짓는 것도 아주 편리하죠. 하도 흔해서 추적하기도 망측하고 ㅇ>-<
Commented by 아께뜨라쁘 at 2008/02/01 13:40
고드릭 그리핀도르-ㄱㄱ
헬가 후플푸프-ㅎㅎ
로웨나 레번클로-ㄹㄹ
살라자르 슬리데린-ㅅㅅ

주문이름이나 기타 이름에도 꽤 다양한 의미가 있더라고요.
Commented by 잠본이 at 2008/02/01 22:25
트릴로니 하니까 보물섬의 지주아저씨 생각만...OTL
Commented by EST_ at 2008/02/01 23:20
배길수// 그쪽 찾아보면 진짜 엄한 것들도 제법 있을걸요 아마 흐흐흐^^

아께뜨라쁘// 일단 생각나는 것들만 더듬어서 조금 정리해 봤는데, 작정하고 덤벼 보면 제가 모르는 것도 굉장히 많을 것 같아요^^

잠본이// 맞습니다, 잊고 있었어요. 트릴로니씨와 리브지 선생님! :>
Commented by UCHRONIA at 2008/02/03 09:32
'그레인저'에서 뭔가 용자 로봇물의 느낌을 떠올린 저는 막장인가여 [....
Commented by TOMA at 2008/02/03 19:19
카톨릭 성인중이라면
헤드위그는 독일의 성자중의 한명,
붉은머리 론도 아일랜드 성인의 이름중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더군요 .

그리스신화에서 보면
아구스 필치는 100개의 눈이달린 아르고스에서 따온것 같기도.

해리포터 너무 재밌어요 ^_^
Commented by marlowe at 2008/02/04 10:05
스네이프하면, 스네이크가 떠올라요.
(가장 마음에 든다기 보다, 씽크로율이 높은 캐릭터입니다.)
Commented by EST_ at 2008/02/04 14:08
UCHRONIA// 아하하하, 마법용사 그레인저! 로군요.

TOMA// 성인들 이름이 참 다양한데 의외로 세례명으로 쓰는 이름들은 한정적이라서 말이죠. 나중에 성인 명부를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아구스는 본문에 썼듯이 아르고스가 맞아요^^

marlowe// 뱀 같지만 그렇다고 혐오스럽진 않은 매력적인 캐릭터였어요. 기름에 쩔은 머리만 좀 어찌 했으면... 흐흐흐
Commented by 고홍 at 2008/02/05 04:03
정정합니다. 라틴어로 늑대는 레무스가 아니라 루퍼스Lupus가 맞습니다. 레무스 루핀이란 이름중 '루핀' 부분의 어원이 됩니다. 레무스는 에스트사마가 말씀하신대로 로마건국형제중 한 사람 이름이 맞습니다. 헷갈려서 죄송.
Commented by EST_ at 2008/02/08 09:52
고홍// 오홓 그렇군요^^
Commented by gambit at 2008/03/22 01:29
진짜 박학다식하시네요. 즐겁게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EST_ at 2008/03/22 01:48
gambit// 늘 재미있는 작품으로 절 즐겁게 해 주시는 gambit님이 즐겁게 읽으셨다니 기쁩니다. 솔직히 박학다식한 건 아니고 관심있는 쪽에 많이 집착하는 편이죠. 세상에선 이런 사람을 아마 오타쿠라고 한다나...(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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