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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루 파인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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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부어맨의 <엑스칼리버>는 중학교 때쯤인가 TV에서 한번 방영해 준 적이 있었는데, 당시 아버지께선 화면이 어둡고 뭔가 그로테스크한 느낌이 풍기면 시청하지 못하게 하시는 기준을 갖고 계셨던 터라 보질 못했었더랬다. 영상으로 처음 만난 건 91년, 양쪽으로 나뉜 실기실 가운데에 자리잡은 영상실에서 간헐적으로 이루어지던 비디오 상영회를 통해서였다. 사실 친구 말마따나 소재만 빌려왔지 히어로물에 가까웠던 애니메이션 <원탁의 기사>라든가 몇몇 동화책 정도를 통해서 '잘 알고 있는 이야기'라고만 착각했을 뿐이지 제대로 된 책을 읽은 적도 없고 막연히 '중세 기사물'이라고만 여겼던 터라 맘 한구석엔 나도 실체를 잘 모르는 막연한 기사 이야기에 대한 환상 같은 걸 품고 있었던 것 같은데, 실은 좀 충격 비슷한 걸 받았다.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날것스러운 화면이나 당시의 내 기준 따윈 한참 웃도는 적나라한 표현 등이 상당히 인상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기사들이 날렵하게 칼날을 주고 받으며 세련되게 싸우기는커녕, 제 갑옷의 무게도 제대로 견디지 못한 채 진창에서 뒹굴거나 이리저리 뒤얽히며 둔중한 칼로 상대를 때리고 으깨 죽이는 모습은 의외였고, 극중 등장하는 에로틱한 표현의 수위나 불륜 또는 근친상간 등으로 이어지는 비릿한 표현들이 어딘가 불편하면서도 상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는 데 놀랐다. 몇년 뒤 다시 비디오를 통해 접했을 때도 그런 느낌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어서 다시한번 살짝 놀랐는데, 스토리나 이야기 전개 방식 보다는 마치 직접 몸에 와 닿는 듯한 비주얼이 짙은 잔상을 남기는 영화였다. 부분부분 숨어있는 여러가지 상징들이나 의도적으로 과장된 효과로 가득한 화면들이 참 인상적이었기에, 오랜 시간이 지나면 머릿속에서 다소 윤색되거나 지워지곤 하는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몇몇 장면들은 아주 또렷하게 머릿속에 자리잡은 영화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내겐 굉장한 이미지 그 자체로 남아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우더 왕이 멀린의 마법에 의해 모습을 바꾸고 이그레인과 가지는 초반의 거친 정사 장면인데, 갑옷과 알몸이 일으키는 그 질감의 대비는 단순히 시각적인 것을 넘어선 체감이었다. 란슬롯과 귀네비어의 정사 장면도 노출도 외엔 그리 수위가 높다곤 할 수 없지만, 단순히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아니라 살갖과 살갖이 닿는 듯한 느낌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한 장면으로 기억되었다. 아더가 엑스칼리버를 뽑는 장면은 특별한 효과를 사용하지 않고도 무게 있는 신비감을 주었고, 마치 연극무대를 연상케 하는 마지막 전투의 장면들은 일찌기 다른 영화에서 만나지 못한 느낌을 전해주었다. 모가나의 출산 장면이나 나무에 매달린 기사들의 시체에서 까마귀가 눈을 쪼아 먹는 장면들 또한 뇌리에 콱 박혔다. 갑옷째 잘려 떨어지는 팔다리나 몸을 뚫고 나가는 창 끝에서 한줌의 고깃덩이가 툭 날아떨어지는 듯한 느낌이며 특히 마지막에 자신의 몸을 관통한 모드레드의 창을 잡고 앞으로 걸어가 칼을 내리꽃는 아더의 모습 등은 날것스러우면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었다. 어딘가 모호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여러가지 은유가 상당히 직접적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글이나 말로 딱히 요약하진 못해도 이야기와 정서의 흐름은 와 닿는 기묘한 영화이기도 했다. 성배를 통해 다시 일어선 아더가 빛나는 흰 갑옷을 입은 기사들을 이끌고 흩날리는 꽃잎을 헤치며 달리는 부분은 몇 번을 봐도 가슴이 뛰는 장면이고, 퍼시벌이 던진 엑스칼리버가 호수의 숙녀 손까지 날아가는 장면은 그야말로 걸작이다. 대체 어디서 굴러먹던 프린트인지 화질 열화도 상당하고 영사도 엉망이었으며 어딘가 장난을 쳤는지 화면비도 마치 거대한 TV를 보는 듯한 열악한 환경이었던 데다, 오래된 영화라 다소 지금과는 다른 영화적 문법으로 접근하는 장면들이 종종 있긴 했으나 그리 우스운 장면이 아닌 곳에 이르러 주위에서 큰 웃음이 터져나오곤 해서 그건 좀 아쉽긴 했지만, 종국엔 초반의 극악한 붉은빛 화면따윈 신경도 쓰이지 않을 정도로 즐겁게 보았다. 한참 늦었지만 극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기쁘다. - <엑스칼리버>는 영화 외적인 잡스런 이야기들에 관심이 많은 사람 입장에서 <엑스칼리버>는 꽤나 흥미로운 영화다. 아더 역을 맡은 나이젤 테리는 그 이후로 딱히 어떤 영화에 출연했는지 잘 모르겠는데, <트로이>에서 트로이의 원로원 수장으로 나왔을 때 목소리를 듣고 알아본 게 괜히 반가웠더랬다. 모가나 역을 맡은 배우는 <더 퀸>으로 아카데미상을 손에 쥔 헬렌 미렌이고(이사람이 <백야>에도 나왔던 건 미처 몰랐다), 랜슬롯 역을 맡은 니콜라스 클레이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홀마크 영화인 <오딧세이>에서 메넬라오스 역을 맡았고, <멀린>에도 출연했다. 왕비의 부정함을 문제삼아 랜슬롯과 결투를 벌였지만 나중에는 제일 먼저 성배 원정에 나서 모드레드에게 살해당한 거웨인 역은 리암 니슨이 맡았고, 칼을 뽑은 왕을 인정한 탓에 전쟁마저 감내하게 되는 귀네비어의 아버지 역으론 패트릭 스튜어트가 나온다. 함께 본 친구 MiG가 어린 모드레드 역을 맡은 배우의 성이 '부어맨'이더라고 해서 찾아보니 어린 모드레드 역을 맡은 배우는 존 부어맨의 아들이고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이그레인 역을 맡은 배우는 존 부어맨의 딸이더라. 사실 이걸 찾으며 뭔가 더 있지 않을까 해서 뒤져보고 제일 놀란 건 우더 역이 가브리엘 번이었다는 점. (전혀 몰랐다 OTL)이번에 다시 보니 음악은 트레버 존스가 맡았더라. - 시작 전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가 Sion님을 만났다.(으하) 나오면서 다시 인사나 나눌까 해서 둘러봤는데 결국 다시 만나진 못했지만, 의외로 영화제 같은 데서 종종 뵙곤 해서 반갑다.^^ - 운영이나 관람 환경이야 어찌되었던 명색이 영화제인데, 엔드 크레딧 올라가는 동안 일어서 나가는 사람들은 솔직히 이해가 좀 안 간다. 극장에서 불을 켜주지 않으면 앉아있으란 이야기 아닌가? <엑스칼리버>는 영화에 비해 그리 자막이 긴 편도 아니건만. - 왠지 요즘 애들이 모드레드의 투구를 보면 <타짱>이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마지막에 아더가 자기 몸을 꿰뚫은 모드레드의 창을 잡고 당기며 앞으로 가는 장면은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스타트렉 극장판 <스타 트렉: 네메시스>에서도 한번 변주되는데, 그 장면에 나오는 사람이 아더의 장인이었던 피카드 함장이란 사실이 왠지 재미있다. - 다른 사람들은 잘 몰라도 패트릭 스튜어트와 리암 니슨을 보고 있으면 '이 사람들은 시간이 멈춘 영역에 살고 있는건가'라는 생각이 살짝 드는게 묘하다. 오래전부터 그 모습이었고 지금도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는 듯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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