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전 일산 CGV에서 Loomis님과 함께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를 두번째로 관람했다. 개봉 당일 표를 손에 쥐고 있었으면서도 왠지 그날은 뭔가 마음 한구석에 켕기는 게 있었던지 퇴근 직전까지 취소할까 말까 고민하다 극장으로 향했던 것도 있고, 그 와중에 엄청난 스포일러도 하나 맞닥뜨린 데다 극장에선 이웃들을 잘못 만나 정색을 하고 화를 내는 둥 약간의 굴곡을 거쳐 영화를 보고 나왔더니 자전거 앞바퀴 바람이 몽창 빠져 있더라는 상황을 접하곤 다소 우울한(?) 기분으로 힘들게 귀가하면서 내내 '매력적인 세계관을 시리즈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해놓곤 왜 이렇게 허술한 시나리오로 마무리를 지었을까'하는 생각이었는데... 왠지 한번 더 보면 느낌이 많이 다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게 적중했다.
스포일러가 꽤 들어갔을지도 모르게 이어지는 내용
솔직히 말해서 이번 3편의 시나리오는 '후졌다'. 2편에서 한껏 기대치를 부풀려 놓은 채 3편으로 미뤄두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나가기에도 벅찰 거라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2편까지 듣도보도 못했던 설정들이 그 위에 겹쳐 나오기 시작하는데 이게 치밀한 구성을 위한 게 아니라 단지 다음 장면을 끌어가기 위한 억지 장치처럼 느껴지니 감정이입은 고사하고 대체 마무리를 어찌 지으려는 거냐 하는 걱정부터 앞서게 되었다. 등장인물 각각의 매력을 보여주는 역할이긴 하나 전체 스토리를 놓고 봤을 땐 곁다리에 해당하는 장면들이 많은 건 사실 1편부터의 특징이긴 했는데, 가뜩이나 꽉꽉 채워넣어야 할 내용들로 가득한 3편에서도 초반에 그런 여유를 부리는 걸 보면서 좀 질렸다고 해야 하나.
기대했던 주윤발은 객관적으로 아쉬울 수 밖에 없었고, 더욱 기대했던 크라켄은 아예 반쯤 썩은 듯한 시체로 등장하는가 하면, 예고편을 통해 이거 정말 끝내주겠다는 기대를 왕창 불러일으킨 함대전은 결국 등장하지 않았다. 해적연합은 좋긴 했지만 사실 한 일도 없었고... 기대를 했던 사람들이라면 배신당했다는 기분마저 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실 주윤발이 연기하는 사오펭의 경우 짧고 굵은 활약 한장면 정도만 넣었어도 그리 실망스럽진 않았을 것이다. 또, 좀 세심하게 처리해 주었으면 좋았을 몇몇 장면들이나 설명 등이 부족했던 이유로, 잘 풀어나갈 수 있었던 내용들까지 다소 어처구니없게 느껴지는 데가 꽤 많았다. 애시당초 티아 달마와 잭 간에 있었던 모종의 관계 같은 건 그리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으니 상관없다고 해도, 칼립소와 데비 존스의 슬픈 사랑... 은 솔직히 대체 뭐가 어떻게 된거냐라고 보는 사람이 애써 고민하며 짜 맞춰야 할 판이라 두 캐릭터의 매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쉽다. 그러니까, 막판에 칼립소가 해적연합 편을 든 건지 아니면 더치맨 편을 든 건지만 제대로 설명했어도 '대체 엄청나게 강한 힘을 가졌다는 여신이 나와서 소용돌이 하나 일으키고 말았는데 그게 뭘 한건지도 잘 모르겠다'는 푸념은 피할 수도 있었을텐데.
여러모로 <스파이더맨 3>와 비교를 하게 되는 것이, 양쪽 모두 시리즈 3편이고 비슷한 핸디캡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파이더맨 3>는 장점이 더 눈에 보이고 이쪽은 단점이 더 눈에 띈다는 점이랄까. 하지만 다소 얼떨떨했던 첫인상과 누구나 볼 수 있는 허술한 디테일에도 불구하고, 맨 처음에 썼듯이 '후졌다'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이, 극장에서 얻을 수 없는 최고의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물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해적이란 소재로 매력적인 인물들과 흥미로운 세계를 만들고, 최첨단 영상기술로 전에 없는 볼꺼리를 유감없이 쏟아내는 이런 작품이 그리 흔한 것도 아니고. 해서 아주 약간만... 이라는 아쉬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소 구렸던 첫인상과는 정 반대로 오히려 올 여름에 굉장히 즐겁게 본 작품으로 기억될 듯 하다. 내 경우는 두번째 보면서 장점들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되었고 음악을 반복해 들으면서는 묘하게 그리움까지 느끼고 있는 상황인데, 슈렉이 극장가를 점거할 기세가 슬슬 보이는 듯 하니 디지털 상영 끝나기 전에 한번쯤 더 볼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
- 조니 뎁이 연기하는 잭 스패로우의 매력은 여전한데, 허허실실 건들건들 종잡을 수 없고 신뢰는 더더욱 안 가는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할때는 한다... 는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이 참 대단하다. '다중 잭'은 좀 너무 나갔다는 느낌이긴 하지만 팬들이라면 꽤 즐거웠을 법 하고...('잭 밭'이라 쓰고 '잭팟'이라고 읽을 지도) 잭 캐릭터의 모티브를 제공했다는 키스 리처드의 등장 장면은 괜히 아주 맘에 들었는데, 왠지 후크선장 생각도 좀 나더라. 몇마디 하지도 않은 채 기타(!)를 잡고 분위기만 좀 내는 정도일 뿐인데도 그 위압감이랄까 하는 게 상당했다. 천둥벌거숭이인양 생각 없는 사람처럼 굴던 잭이 좀 심각하게 쫄았달까 하는 분위기도 좋았고. 덤으로 그가 갖고 나오는 해적법전에 대해 '모건과 바솔로뮤가 썼다는'이라고 설명하는 부분도 즐거웠다. 예전에 만난 <해적의 역사>라는 책에서 헨리 모건과 바솔로뮤 로버츠에 대해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인데, 이 두명의 이름은 <원피스>에서도 각각 모건 대령과 칠무해인 바솔로뮤 쿠마로 차용되어 등장한다.
- 윌 터너의 마지막에 대해선 초강력 스포일러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대체 저걸 어떻게 풀려고 저렇게 끌고 나가나'하는 생각을 감출 수 없었던 만큼, 나름 파격적인 처우에 다소 놀랐다. 인간의 셈으로 따지면 참 기구한 사랑이 되어버린 셈이지만 한편으론 견우직녀 생각도 나는 마무리가 싫지 않았고 오히려 동화같은 느낌으로 끝난 게 살짝 여운이 남는다. 엔드 크레딧 후에 나오는 장면에서 엘리자벳의 얼굴에 녹색 섬광이 비치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다면 좀 더 긴 여운을 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 봤다.
- 키이라 나이틀리의 엘리자벳은 참 매력적이다. 일장연설이나 새된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 같은 건 좀 어색하긴 하더라도, 이런 류의 활극에 참 잘 어울리는 배우라는 생각이다. 특히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쁜 웃음을 지을 때 참 괜찮다. 귀환한 잭을 보면서, 살아난 윌을 보면서, 10년만에 돌아온 플라잉 더치맨을 보면서 짓는 표정이 참 좋다. 지저분한 남자들 사이에 둘러싸여 우아하면서도 날이 서 있는 매력을 자랑하는 모습도 좋다.
- 이런저런 리뷰들을 통해 최고의 캐릭터로 등극한 캡틴 바르보사도 유감없는 매력을 발휘한다. 협잡과 배신과 음모를 꾸미는 데 더할나위없이 머리를 굴리면서도 은근히 보수적인 모습이라든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륜을 보일 때면 그런 매력은 배가 된다. 물보라가 몰아치는 갑판에 서서 좌우로 칼을 마구 내지르며 '이제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습니다~'를 외치는 장면이 특히 좋았다. 2편에선 좀 억지스럽게 계속 내보내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시 했었던 예의 콤비도 바르보사와 잘 얽히면서 꽤 맘에 드는 캐릭터들이 됐고, 불사의 애완(웃음)원숭이 잭도 귀엽다.
- 데비 존스도 여전히 멋진 캐릭터. 슬픈 로맨스를 좀 더 잘 부각시켰다면 한층 기억에 남을 캐릭터가 되었을 텐데 약간 맥없이 퇴장한 감이 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통해 처음 만난 빌 나이는 점점 좋아지는 배우인데, 수염투성이이긴 했으나 이번에 맨얼굴을 잠시라도 보여줘서 반가웠다. 분장과 컴퓨터 그래픽의 힘을 빌리면 이제 상당한 영역까지 소화가 가능하겠구나라는 놀라움을 몸소 보여주는 멋진 캐릭터인데(실은 이게 데비 존스의 진짜 무서움이다. 도대체 저거 어떻게 만들었지?라는 고민을 굉장히 하게 만드는 비주얼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전부 CG라고 해서 덜덜 떨었다나 뭐라나), 그 와중에 원래 인상이 남아있는 것도 좋다. 여신 칼립소였다는 것이 밝혀진 티아 달마도 꽤 매력적인 인물이었는데 그걸 별로 살려내지 못한 건 아쉽다.
- 주윤발의 사오펭은 잘 나가는 헐리웃 배우들 사이에서도 존재감이 꿇리지 않을 만큼의 캐릭터이긴 했는데, 앞에도 썼듯이 이렇다 할 만한 활약상 하나만 보여줬더라면 참 좋았을 것 같다. 의심하고 배반하고 탐내다 어이없이 죽는다... 는 것이 역할의 전부였던지라. 일세를 풍미하던 의리의 형님이, 그저 분노로 얼굴 근육을 부들부들거리는 정도만 보여준다고 해서 '와아 주윤발 멋져'라며 좋아할 수는 없잖은가. 기왕 크라켄을 퇴장시킬 거였으면 아예 그 역할을 사오펭에게 맡겼어도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도 해 본다.
- 그 외에도 이젠 거의 정규 멤버가 되다시피 한 수많은 조연들도 흥미롭다. 잭이랑 묘한 앙상블을 이루는 갑판장 깁스도 왠지 정이 가고, 초췌한 몰골로 가발을 쓴 채 잡무를 보고 있는 스완 총독(조나단 프라이스)은 그 얼굴만으로도 마치 그 시절에 진짜로 있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비중상 어쩔 수 없었다손 쳐도 2편에서 상당한 존재감으로 돌아온 노링턴은 맥없는 퇴장의 와중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데비 존스의 가슴에 칼을 꽂아넣는 모습이 좋았다.
- 한스 짐머 특유의 음색을 자랑하는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인데, 이번 작품도 음악이 은근히 좋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노래는 한번 보고 나니 선율이 귀에 쏙 박혀서 지워지질 않더라. 사운드트랙에선 영화에 나온 풀 버전이 아니라 좀 아쉽긴 하지만 뒷부분의 3곡은 듣는 것 만으로도 왠지 영화를 다시 봐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을 마구 준다. ILM의 이름이 전면에 나오는 영화 시각효과는 전반적으로 어디 흠잡을 데 하나 없이 최고의 수준이다. 함대전이 아니라서 실망했다곤 하지만 소용돌이 가운데서 벌어지는 블랙펄과 더치맨의 한판 승부는 그야말로 예술이었고, 마치 짭쪼롬한 바닷 바람의 맛이 느껴지는 듯한 거친 물보라와 함께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액션 장면 하나하나에 공들여 만든 티가 역력했다. (개인적으론 세상의 끝에서 잭을 인도하는 자갈 게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 다른 분 말마따나 이제 '윌 터너 3부작'은 마무리된 셈이지만, <캐리비안의 해적>은 언제 다른 편을 만들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세계관을 만들어 뒀으니 분명히 다음 작품 이야기가 언젠가는 들려올 것만 같다. 3편을 이어오면서 쌓아온 많은 캐릭터와 여러가지 단초들로 <캐리비안의 해적>이 다시 찾아온다면 그것도 꽤 즐거운 일일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