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콩은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거대한 괴물의 대명사다. 친구들과 골목골목을 뛰고 뒹굴며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보자기를 둘러매고 '슈퍼맨'을 흉내낸 것 이상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킹콩'을 외친 기억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내 어린시절에 깊이 각인된 킹콩은 메리언 쿠퍼의 1933년작 오리지널 <킹콩>이 아니라 1976년에 리메이크된 존 길러민의 <킹콩>이다. 원전을 찾아볼만큼 관심이 있지 않다는 전제 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보면 과연 왕도복고를 외치는 듯이 오리지널을 철저히 리메이크했다는 2005년작 <킹콩>에 대한 반응도 일견 수긍이 간다. 압도적인 화면에서 V-렉스와 킹콩이 맞붙는 장면이 나오는 예고편을 보면서, 저거 언제 개봉하나를 마음속으로 외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을 테고, '공룡 나오네. 또 쥬라기 공원이냐?'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을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 덕분이라 하긴 무엇하나 결국 개봉 첫날 표가 남아도는 통에 속편히 <킹콩>의 개막을 축하하며 극장에 앉아있을 수 있었지만.
개봉 전부터 떠돌던 많은 루머나 일체의 내용을 알지 않기 위한 노력들 혹은 '우리나라에서 괴물영화로 인식될 것이 뻔한 <킹콩>이 과연 흥행 가능할까'등의 이런저런 외적인 것들은, 영화가 시작되면서부터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한마디로, 피터 잭슨의 <킹콩>이 화면에서 돌아가는 세 시간은 내가 극장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대의 즐거움이었다. (내가 무슨 미사여구로 찬사를 보낸들
Loomis님의 단 한줄에는 미치치 못할 테지만) 첫번째 관람을 마치고 나서 이러저러 할 말도 정말 많았었지만, 두번째 보고 나서 정리를 해 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이런 작품을 만난 여운을 며칠이나마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치도록 지루한 시간일 수 있는 세시간의 러닝타임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보내며 '옛날 사람들이 극장에서 보고 싶었던 건 바로 저런 것이 아닐까'싶을 정도의 멋진 장면들에 몰입하면서도 감동과 감탄과 오만가지 느낌들이 머리 한쪽에서 계속 돌아간다. <해리포터와 불의 잔>을 한번 더 보면서 못 잡아낸 장면들을 구석구석 살펴봐야지 하는 생각도 함께 날아가 버렸다. 헤르미온느 양에겐 미안하지만(음?) 해리포터를 한번 더 볼 여건이 된다면 <킹콩>을 두어번 더 보련다.
<킹콩>을 단순한 괴수재난영화로 규정지을 수 없는 것은, 주인공들의 살아있는 캐릭터를 느꼈기 때문이다. 나오미 왓츠가 연기하는 주인공 앤 대로우는 극단에서 아크로바틱한 코믹 연기를 펼치는 배우지만, 대공황의 시기에 일자리를 잃고 당장 끼니를 걱정하는 처지가 된다. 미모를 활용하여 성인극단에 출연하면 당장 배 곯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건만, 차마 그렇게는 못 하고 배고픔에 못이겨 사과를 훔치다 영화감독 칼 데넘(잭 블랙 분)의 눈에 띄어 운명적인 여정에 한 발을 내딛는다. 길러민 판 <킹콩>의 여주인공이었던 드완(제시카 랭 분)은 어린 마음에도 '도대체 저 여자 뭐야?'라는 생각이 들만큼 짜증이 나게 만들었던 캐릭터였기에, 시대상황과 잘 어울리는 배경을 가진 앤이 더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다소 유아적인 이야기지만 거액의 출연료를 거부하고 킹콩의 무대에 서지 않은 부분이 결정적이었을지도. 다른 극장에서 무희로 춤을 추고 있는 앤을 '검은 새'라는 노래와 함께 교차편집으로 보여주는 부분은 참 좋았다) 뱃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이나 '내가 가야 콩이 얌전해진다'며 뱃전에서 발버둥치던 장면 등이 좋았다라는 건 결국 내가 착해빠진 캐릭터를 은근히 좋아한다는 얘긴지도 모르겠지만, 살짝 입술을 벌린 채 조금 올려보는 듯한 표정은 정말 아름다웠다.
앤이라는 캐릭터가 콩과의 교감에 있어서도 상당히 능동적이었던 부분들을 엿볼 수 있었던 것도 그렇고 지금까지 그다지 친숙하지 않았던 나오미 왓츠의 아름다운 얼굴에 감정이입이 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목숨을 건 재롱' 장면에 묘하게도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금주법과 대공황의 시대에 극장에서 퇴출된 앤이 보여주는 갖가지 연기에 콩이 즐겁게 반응하는 부분은, 단지 인간 여성이 보여주는 재롱을 보며 거대한 야수가 즐거워한다는 상황을 지나 '연기자와 관객'의 관계로 읽혀졌기에 그렇다. 가난한 극단에서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연기해온 앤에게 콩은 그녀를 보고 웃는 관객이 되어준 것이다. '25센트로 누구나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하겠다'는 취지로 수많은 희생을 유발하며 끝까지 흥행사의 역할을 고수한 칼이 모피와 보석으로 치장한 상류계급의 사람들 앞에서 콩을 선보이는 모습과 묘한 대조가 되면서 뒤이어 다시 그 상류계급 사람들이 앉은 자리를 싹 부수고 뭉개는 장면이 나오니 정말 절묘하지 않은가. (내가 딴 나라 사람이라 그렇지, 그 역사를 자신의 것으로 안고 있는 미국인이었다면 사뭇 감정이입의 정도가 다르지 않았을까 싶다)
칼 데넘의 이야기로 은근슬쩍 넘어가자면, 잭 블랙을 기용한 점은 정말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야심으로 모든 화의 근원을 만들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어찌보면 진정한 악역이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오죽하면 길러민 판에서는 칼의 역할을 대신하는 찰스 그로딘을 밟아 죽여버렸을까) 밉지가 않다. 오히려 악당이라기보다는 자기현시욕에 불타지만 능력은 다소 떨어지는 고집불통 예술가 같은 느낌마저 든달까. 어떤 면에선 상당히 사악한 마스크를 하고 있으되 그것이 나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개구쟁이같다고 느껴지는 잭 블랙의 연기는 복고적인 시대상황과도 잘 어울리고, 무엇보다도 착해빠진 여주인공과 한결같은 남주인공 사이에서 가장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남자 주인공인 잭 드리스콜은 이번엔 극작가로 설정되었는데, 에이드리언 브로디가 일견 유약한 듯 보이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기 위해 거의 슈퍼맨 급의 인디아나 존스로 변신하는 모습(웃음)을 설득력있게 표현했다. 앤이 배우인지라 잭이 극작가라는 설정은 상당히 타당성있고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자신이 평소 눈여겨 보았던 극본을 쓴 작가에게 관심이 생긴다는 얘기, 있을 법 하지 않은가. 생존과 성공에 대한 동물적인 감각마저 지니고 있는 칼과는 대조적인 모습도 흥미로웠고, 차를 몰고 콩을 유인한다는 전례가 없는 액션까지 선보인다. 산전수전 다 겪고도 결국 드완과는 잘 안 될 것 같다는 뉘앙스를 팍팍 풍겼던 길러민 판의 잭(제프 브리지스 분)과는 달리 이번에는 잘 되겠구나 싶은 모습도 좋았고.
그외 등장하는 조연들 역시 꽤나 흥미롭고 매력적인 사람들이었다. 뭔가 상당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음직했던 잉글혼 선장도 꽤 멋진 양반이었고, 항해사 헤이스 역시 그 이상으로 멋진 사람이었다. 제이미 벨이 연기하는 지미는, 뭔가 더 있지 않을까 했던 점에선 약간 아쉬웠지만 다양한 남자들이 등장하는 세계에서 거칠게 자랐으되 여리고 섬세한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돋보였고, 골룸에 이어 킹콩까지 2대 디지털 캐릭터의 모션 캡쳐 연기를 커버하는 기염을 토했던 앤디 서키스가 연기하는 요리사 럼피도 묘한 매력이 있는 캐릭터였다. 거대 공룡들이 질주해 오는데 그 다리 사이를 정신없이 뛰면서도 담배를 빨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일품이었고, 중간중간 보여주는 모습들도 좋았으며 처절하게 죽어가던 마지막까지도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으론 사람 좋은 인상의 최씨 아저씨(웃음)도 괜히 정이 갔고, 특히 마음에 들었던 브루스 백스터(카일 챈들러 분)가 등장하는 부분마다 웃음을 참느라 아주 애를 먹었는데,
조나단님의 말씀처럼 '대체 저런 사람을 어디서 주워왔나' 싶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웃음을 자아내는 모습이야말로 원판 <킹콩>류의 모험영화 주인공 배우를 그대로 빼다 박고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킹콩에 이르러서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3: 시스의 복수>를 보면서 느낀 것과 비슷한 감정이랄까. 현대 문명과 충돌하는 원시적 야수성의 현신과도 같았던 콩에게 단순히 불쌍하다 이상의 감정을 이입시킬 수 있게 연출한 부분에 대해서는 일단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rumic71님의 말씀마따나 '미녀와 야수'가 '마님과 머슴'의 구도로 되어버린 셈이니, 피도 눈물도 없었던 희대의 악당 다스 베이더를 슬픈 과거를 지닌 비련의 주인공으로 만들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면에서는 아쉬울 사람들도 있겠지만 맙소사, 센트럴 파크의 그 장면은 정말이지... 킹콩 영화를 보러 가서 눈물을 훔치는 여성 관객들을 보게 될 줄이야. 3시간의 러닝타임은 분명 길고도 긴 시간이지만, 적잖은 시간을 할애하여 콩의 감정이나 앤과의 교감을 표현하는 데 공을 들인 때문인지 거대한 야수와 미녀의 감정 교환이라고 하는 말도 안되는 상황에 200% 보는 이의 감정을 실을 수 있었다. 연출에 따라서는 상당히 유치한 장면이 되었을 수도 있는 장면들이 코끝을 시큰하게 만드니 이것도 어떤 의미에선 참 죽을 맛이다.
어떤 면에선 역시 내겐 첫 킹콩이었다고 할 수 있는 길러민 판에서 콩과 드완의 성적 긴장감을 유난히 강하게 느꼈던 터라 이번 작품이 좋았던 것 같다. 연약한 미녀를 잡아다 놓고 손가락으로 옷을 하나씩 벗겨 나가는 콩의 능글맞은 표정이나 물에 젖은 자신을 입김으로 불어 말려주는 콩의 손바닥 위에서 거의 오르가즘에 가까운 표정을 짓던 76년의 드완은 분명 어린 마음에도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올 만큼 의미심장한 비유였겠지만, 상대적으로 인간과도 같은 콩의 감정 표현에 충실한 이번 작품이 난 좋다. 콩이 혼자 열받아 벽 부수고 밥상 뒤집고(웃음) 있는대로 성질 부리다 떨어져내리는 바위에 머리를 맞고는 골이 잔뜩 난 채 사라져가는 모습이라든가, 렉스들과 3:1로 벌이는 처절한 싸움에서 앤을 구해내고도 정작 이쪽으론 눈길도 잘 주지 않은 채 잔뜩 삐진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 등은 그야말로 감정표현이 섬세하지 못한 무뚝뚝한 남자 그 자체인지라, 홍소를 터뜨리는 가운데서도 뭐랄까 동질감까지도 느껴질 만큼 재미있었고 캐릭터에 몰입할 수 있는 장면들이었다. 그렇기에 렉스와 콩이 대치한 상황에서 기묘하게 '너 이제 큰일났다'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콩 쪽으로 뒷걸음질을 치는 앤이 여전히 화난 듯한 표정으로 걸어가는 콩의 뒤를 쫓는 장면들을 보면서 단순히 웃음 외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으리라.
마초 캐릭터다라고도 회자되는 콩의 성격에 대해서는 사실 딱히 뭐라고 말하기가 참 애매한데, 이건 아마도 내가 남성이라서 그런 것이 아닐지. 사실 공주를 구하기 위해 온갖 고초를 뚫고 공주가 잠든 성으로 뛰어들어오는 눈먼 왕자님이란 건 결국 출신성분이 좋은 머슴일 뿐이다라고 생각하곤 하는데, 조금 다르긴 하지만 이번 <킹콩>에서는 그런 머슴이 둘이나 나온다. 하나는 거대한 야수, 또 하나는 일견 심약해보이는 인텔리 스타일의 극작가. 둘 다 사랑하는 여인을 찾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돌진하는 캐릭터인지라, 막판 극장에서 콩과 잭이 마주치는 장면에선 절로 까닭 모를 탄성이 터져나왔다. 렉스 세마리를 상대로(예고편은 확실히 낚시질에 성공한 듯 하다. 세상에 예고편에 나왔던 녀석들이 전부 다른 개체였다니!)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 콩도 굉장했고 관객들 사이에서 혐오감이 실린 반응이 술렁거릴 정도였던 벌레 계곡을 지나서도 맨몸으로 콩을 찾아가는 잭도 결코 만만치 않으나 역시 전체적인 몰입도를 생각해 볼 때 콩 쪽이 아무래도 우세할 수 밖에 없지만.
사로잡힌 신세가 되어 구경거리로 전락했다가 탈출해서 오로지 사랑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마천루의 숲을 헤매다 결국 엠파이어 스테이츠 빌딩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콩이 비련(?)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해서, 결코 야성을 대변하는 그 광폭한 매력이 감소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는 듯이 느껴지는 해골섬에서의 액션은 그 어떤 영화보다도 확실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면서 콩의 캐릭터에 힘을 실어준다. 그것이 단순히 강력한 괴물들간의 사투가 아닌 감정을 가진 콩의 싸움으로 보여질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번 <킹콩>을 보면서 느낀 즐거움 중 하나였다.
영화는 크게 세 파트로, 공황기의 뉴욕에서 시작하여 해골섬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까지가 첫번째, 해골섬에 들어가서 콩과 조우하고 사로잡기까지의 과정이 두번째, 그리고 다시 돌아온 뉴욕에서 벌어지는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느 파트 하나 지루함을 느낄 짬이 없었다는 점도 놀랍다. 물론 이 영화에 대해 느낀 다소 편파적일 정도의 좋은 감정 때문에 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두번 보는 동안 내내 지루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으니 역시 놀랍다는 생각을 거두고 싶진 않다.
각각의 주인공들과 함께 일의 발단을 보여주는 전반부는 확실히 해골섬 이후의 장면들에 비해 다소 평이하다는 감도 느낄 수 있겠지마는, 그게 현대가 아닌 과거의 풍경과 함께 진행되는 까닭에 좋았다.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 앉고 산 입에 거미줄을 치는 시대였다곤 하나, 정겨운 음악들과 함께 펼쳐지는 그 시대의 뉴욕은 전혀 상관없는 나같은 사람에게도 묘하게 로맨틱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여담으로 새 여배우를 섭외하는 장면에선 뒤집어질 만한 조크가 나오는데, 정작 극장에선 놓쳤다가 나중에야 다른데서 듣고 알았다. 거론하는 여배우들의 이름 중에 매 웨스트가 있었던지라 '실존인물들 얘긴가보네?'라고만 생각했었건만 '페이 레이는 RKO의 쿠퍼 영화에 출연중이래요'라니 죽이지 않는가. 이럴때 역시 아는것만큼 보인다라는 사실에 또한번 가볍게 좌절하게 된다)모험호에 탑승한 다음부터 전개되는 소소한 이야기들은 다소간 뒤틀린 전개를 암시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가볍게 웃으며 볼 수 있는 즐거운 내용들이었고, 거친 뱃사람들의 디테일한 모습도 함께 보여주면서 롤러코스터를 타기 전 충분히 영화에 몰입할 만한 여지를 제공해 주는 셈이다.
해골섬에 도착한 이후로부터는 그야말로 숨쉴 틈 없이 빠른 템포로 몰아치기 시작한다. 국적 불명의 흑인들이 윤무를 벌이던 과거의 작품들과는 달리 확실한 지방색이 느껴지는 원주민들의 묘사라든가(개인적으론 모험호에 침투하는 장면에서 아주 감탄했다. 실제로 말이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다), 원전에 바치는 유감없는 경배라도 되듯 거대한 공룡들이 몸을 부딪치며 육박하는 장면들도 압도적으로 질주해 온다. 많이 회자되는 3:1의 격투 장면은 아주 작정을 하고 덤벼든 장면으로 느껴질 만한 박력이 있는데, 예의 턱 째는 장면 역시 아주 잘 묘사되었다. (두번째 보면서는 낼름거리는 렉스의 혀를 킹콩이 물어 끊고는 뱉어내는 장면을 찾아내서 아주 즐거웠다나)
유일하게 템포가 느리게 느껴지는 벌레 계곡 장면은 앞서 말했듯이 관객석이 술렁거릴 정도의 느낌으로 다가오는데, 오로지 보는 이로 하여금 혐오감만을 주기 위한 것만이 존재 목적인 듯한 벌레며 거머리의 공격을 보면서 개인적으론 오래된 옛날 모험 영화를 떠올리게 되었다. 옛 영화들에서 오지의 낯선 환경이 얼마나 야만적이고 무서운가를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위험한 맹수들이 득실거리는 환경을 조성한다든가 등장인물들이 하나둘씩 잡아먹히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달까. 엄청난 밀도의 배경만 봐도 충분히 장관이라 할 만한 해골섬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영화 한편은 충분히 충족시키고도 남는다. (엔드 크레딧을 보니 배경설정은 알란 리가 한 모양이더라. 화보집 사느라 또 돈 들어가게 생겼다)
콩을 포획하여 돌아온 이후부터 펼쳐지는 뉴욕에서의 이야기는 액션과 로맨스가 절묘하게 배합된 부분이었다. 눈이 돌아갈 정도의 충분한 즐거움을 선사하면서도, 앞부분에 공들인 주인공들의 교감을 바탕으로 이 작품의 메인 테마라 할 수 있는 야수와 미녀의 이야기를 아름답게 그려낸다. 특히 클라이막스인 엠파이어 스테이츠 빌딩 장면에서는 눈이 아찔한 구도에서 줄곧 이야기가 진행되는지라 보는 내내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참고로 나는 높은 곳을 꽤 두려워하는 편이다) 하지만 단순히 대미를 장식하는 화려한 볼거리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고, 치켜세울 엄지손가락이 두개뿐인 것을 한탄할 정도로 좋았던 이 작품에 대한 깊은 여운을 남기기에 유감없는 장면이었던지라 실로 감동적이었다.
그 어느때보다도 장황하게 늘어놓은 감상문이 되었는데, 이 영화가 훗날 영화사적으로 어떤 위치를 점하게 될 런지 상상하는 것은 다소 경박한 일이 될 지는 모르겠으나 내겐 상당히 의미깊은 영화가 될 것이라는 점 만은 확실하다. 단돈 25센트에 누구나 환상의 세계를 볼 수 있게 해 주겠다던 칼 데넘은 결국 재앙을 몰고 도심으로 돌아왔을 뿐이지만, 피터 잭슨은 내게 <킹콩>을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감동적인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극장에 앉아 경험하는 지복의 세 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