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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 비긴즈- 2005.6.27.CGV불광
<배트맨과 로빈>이후 상당한 공백기를 거치는 동안 배트맨 영화화와 관련된 루머들을 숱하게 접하면서 마음속으로 느꼈던 가장 큰 불안은, '이러다 정작 어정쩡한 무언가가 나와버리면 아예 배트맨에 종지부를 찍어버리는 건 아닐까'라는 점이었다. 실제로 <슈퍼맨 VS 배트맨>처럼 소문만 돌다 사라져버린 프로젝트도 있었으며 <캣우먼>같은 괴작들이 출현하는 등 과도기를 거치는 동안 그런 걱정이 조금은 더 깊어진 것도 사실이었고, 특히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감독도 아직은 생소했던데다 (아직도 <메멘토>를 못 본 사람인지라...) 크리스천 베일은 과연 배트맨에 어울릴 것인가도 판단이 잘 서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 극장에서 다시 만난 배트맨 <배트맨 비긴즈>는 그동안의 걱정을 순식간에 날려버리는 즐거운 작품으로 다가왔다. 작품성이나 깊이 같은 걸 떠나서, 두시간이 넘는 러닝타임동안 잠시도 지루할 틈이 없었으니 일단 그것만으로도 대만족이다.

<배트맨 비긴즈>의 노선에 대해 들으면서, 지나치게 진지하거나 현실성을 부여한 나머지 배트맨 특유의 과장된 어두움은 잃은 채 자칫 실소를 자아내는 어중간한 영화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 역시 기우였다. 다소 정신없이 진행되는 느낌은 없지 않으나 크리스천 베일은 아직 사리분별보다는 감정에 치우쳐 움직이는 젊은 배트맨 그 자체였고(개인적으로 최고로 치는 마이클 윈코트에 버금가는 무시무시한 저음의 목소리 때문에라도 일단 엄지손가락 하나 추가), 마이클 케인이 연기하는 알프레드에 모건 프리먼이 연기하는 루시우스, 게리 올드만(이건 몰랐던 건 아닌데, 염두에 거의 두질 않았던지라 막상 극장에선 말 그대로 의외의 즐거움이었다)이 연기하는 제임스 고든 등 탄탄한 조역들이 함께 빚어내는 조화 역시 아주 마음에 들었다. 때때로 등장하는 다소 서늘한 유머마저도 아주 마음에 든다. 거기에 리암 니슨이나 룻거 하우어, 와타나베 켄 등의 익숙한 얼굴들까지 가세하니 화면에서 반가움을 느끼는 것 만으로도 상영시간은 후다닥 지나갈 지경이다.

특히 마이클 케인이 연기하는 알프레드는 지금껏 '알프레드는 마이클 고호 뿐이다'라며 쌓아뒀던 걱정을 말끔히 걷어내 줄 정도로 매력적이었고, 루시우스를 연기하는 모건 프리먼은 등장하는 것 만으로도 강한 신뢰를 심어준다. 한동안 광기어린 모습이나 치졸한 악역 등으로 어두운 매력을 보여주었던 게리 올드만이 고담시의 일등 범생이 제임스 고든을 연기한다는 것 역시 일종의 이미지 전복이 주는 재미였는데, 그게 또 아주 잘 어울려서 즐거움은 배가 되었다. (이건 <아메리칸 사이코>나 <이퀄리브리엄>등에서 창백하고 건조한 모습을 보여줬던 베일이 영웅을 맡았다라는 것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게다가 첫인상은 '이게 대체 뭐람'이라는 생각뿐이었던 배트모빌을 활용한 액션도 화려해서, 오히려 이쪽이 더 실용적으로는 말이 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어 버렸다. 브루스 웨인의 어린 시절에서부터 젊은 시절의 방황 및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무술을 사사받아 거듭나기까지의 과정도 완급을 잘 조절하며 무리없이 진행시켰고, 만화적인 요소들을 싹 걷어냈음에도 불구하고 경직되지 않도록 만들어낸 감독의 연출도 놀랍다. 여러가지 면에서 보는 이로 하여금 '아하, 배트맨은 여기서부터 시작했구나'라고 유감없이 느끼게끔 해 주는 즐거운 한편이었다.

칭찬 일색이었으니 잔소리를 좀 늘어놓을 차례. 주인공만큼이나 매력적인 악당들이 포진하고 있는 <배트맨>의 세계이니만큼 당연히 악당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일단은 악당이 가지는 카리스마나 힘을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건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으로 걸음마를 내딛기 시작하는 단계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수긍이 갈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여타 히어로물에 비해 '슈퍼악당'이라기보다는 '미치광이'에 가깝게 보이는 배트맨의 악당들 중에서도 가장 스케일이 크고 강력하다 할 수 있는 라스 알 굴을 너무나 허무하게 낭비해 버린 데 대해서는 심히 유감이다. 뭐 라스 알 굴이야 불사신이나 마찬가지이니 나중에 다시 등장하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게다가 딸인 탈리아도 한번쯤은 나와줘야 할 것 아닌가), 일단 이번 편에서는 그저 신비스러운(게다가 말도 통하지 않는) 동양계 악당 정도로 격하시켜 버렸으니 아쉽다고 할 수 밖에. 게다가 듀커드의 경우는 브루스와의 연대나 개인적인 동기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서, 어찌보면 흠칫 놀랄만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감정 이입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두사람 모두 감정의 기복을 거의 드러내지 않은 채 서로 똑바로 쳐다보며 잘도 지껄이는 걸 봐선 이 점은 브루스도 마찬가지였던 듯 하니 일단 이해하기로 한다.(웃음)

조나단 크레인 교수(허수아비)는 공포를 지배하는 자이니만큼 좀 더 몽환적이면서도 원초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존재로 묘사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이번에는 주변에서 등장할 사람들이나 설명할 이야기도 많았다 보니 이정도로 역할을 축소시킨 것도 수긍은 간다. 크레인을 연기한 킬리언 머피는 이번이 첫 대면인데, 인텔리의 이면에 숨긴 편집적인 광인의 모습을 얌전히 잘 표출시킨 것 같아 마음에 든다. 미스매치를 느낀다라면 그동안 줄곧 중년 이미지로만 생각해 왔다는 것 때문이지만, 뭐 배트맨도 일단은 젊은데다 허수아비는 생사 여부도 불분명하다는 식으로 설명했으니 나중에 좀 더 거물이 되어 나타나길 기대하는 것도 좋을 듯. 전체를 통틀어 가장 불만스러웠던 것은 케이티 홈즈가 연기하는 레이첼이었는데, 자괴감에 빠져 방황을 거듭하고 복수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브루스에게 어떤 동기를 제공하는 올곧은 인물이니만큼 좀 더 매력적으로 묘사되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다. 타협하지 않고 정론을 말하며 고집스럽게 부패의 중심으로 접근하는 모습이, 강직하고 정의롭다기보다는 어쩐지 사리분별을 못하고 무모하다라는 쪽으로 생각되게끔 보여진 탓이다. 유일한 여성 캐릭터라 할 만한 데다 고든과는 또 다른 각도에서 고담 시의 양심을 대표하는 인물이니 아쉬울 수 밖에. 하긴 뭐 배트라이트로 배트맨을 불러내놓곤 '악당에 대해서 새로운 정보를 알아냈어요. 완전 싸이코예요.'따위의 대사를 늘어놓는 니콜 키드먼보다는 나았다고 해야 하나?(솔직히 내가 발 킬머였으면 그 상황에서 '당신 바보요?'라고 해버렸을지도)

현실성을 추구하다 보니 아무래도 고담 시의 모습에서 옛스런 매력을 반감시킨 것은 꽤 아쉬운데, 과장된 양식미를 엿볼 수 있었던 <배트맨 포에버>등과 같은 배경미술의 재미는 떨어진 것이 사실이지만, 마천루와 함께 엉겨붙은 듯한 실루엣을 만들며 죄악의 도시를 내려다보는 배트맨의 모습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넘어가 줄 의향이 있다. (이 부분에선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경탄의 소리를 내질렀다) 고담시민이라곤 해도 모두 악인은 아니다라며 문답을 주고받는 부분에선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기 직전 하느님과 아브라함이 나누던 대화가 떠올랐던 점도 흥미로웠고, 배트맨의 장비를 갖추기 위한 실질적인 발주 같은 부분에서 보이는 유머 코드도 재미있었고, 영화 전체를 관통하며 계속 돌고 도는 대사에서 느껴지는 재미도 만만찮았다.

요약하자면 오랜시간 기다리는 동안 잔뜩 부풀려 놓았던 기우를 한방에 날려줄 정도로, 기다린 보람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는 것이다. 벌써부터 속편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은 사실 지나치게 이르긴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상징물을 보며 다른 많은 이들처럼 나역시 꽤나 들뜬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 정도는 기록해 두어도 좋을 듯 하다. imdb에 올라와 있다는 그 모종의 소문이 아무쪼록 현실로 구현되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 희대의 히트작에 가려 일견 초라해 보이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멋지게 장식하게 되길.
by EST_ | 2005/06/29 23:53 | 영화관 2000 | 트랙백(7) | 덧글(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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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Sion at 2005/06/30 00:07
정말 배트모빌은 원래 이래야 한다! 란 생각까지 들게 할 정도였죠-_-)b (근데 원래가 뭔지 잘 모르잖아_no) 마천루에서 내려다 보는 부분도 말씀하신대로 탄성감>_<)/
Commented by 계란소년 at 2005/06/30 00:14
배트맨 관련은 다 좋은데 역시 배트맨 특유의 과장된 배경과 악당이...
Commented by 직장인 at 2005/06/30 00:20
저는 상당히 이질감을 느꼈습니다. 꼭 이전의 틀에 끼워맞출 필요는 없지만 고담시 특유의 음울하고 괴이한 분위기가 갑자기 현대 뉴욕으로 바뀐 느낌이라 적응하기가 조금 불편하더군요. 워낙 팀버튼의 배트맨 이미지가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임을 알고 있지만, 만화적인 요소를 걷어낸 배트맨을 제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배트맨으로 봐야할지,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작품으로 봐야 할지 헛깔리기도 합니다. 구태여 기존의 시리즈나 원작 코믹과 연관시키지 않는다면 큰 무리없는 작품이라 생각됩니다만..
Commented by EST_ at 2005/06/30 00:28
Sion// 그 마천루 장면은 아주 멋있었습니다. 크흐...

계란소년// 배트맨에 나오는 악당들 정도면 그래도 덜한 편이죠. 저스티스 리그에 나왔던 아마조 같은 녀석들은 악당의 차원을 넘어서 거의 재앙에 가까운 놈들이던데요.

직장인// 저도 그래서 배경이 좀 아쉬웠던 겁니다. 특히 모노레일이 나오는 부분에서 반사유리가 반짝거리던 건물들을 보면서는 참 운치없다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래도 영화 전체를 보았을 때 아주 흡족했던 터라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 은근히 기대를 하게 되는군요. 게다가 속편의 암시로 제시된 악당이 어떤 의미에선 굉장히 만화적인 미스터J라는 점 때문에, 과연 그가 등장한다면 만화적 요소를 걷어낸 비긴즈에서 어떻게 표현이 될런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Commented by kenshiro at 2005/06/30 00:44
배트 수트를 완성하기까지의 시행착오를 보는 것도 참 재미있더군요(헬멧이라던가 날개라던가...). ^^
Commented by 크류일 at 2005/06/30 00:48
기대 이상이었다고나 할까요. 속편이 기대되는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집사님 최고 >.<bb
Commented by EST_ at 2005/06/30 09:13
kenshiro// 마데전자까지 등장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크류일// 벌써부터 속편을 기대하게 될 줄은... 마이클 케인 집사님도 참 멋지더군요.
Commented by 렉스 at 2005/06/30 11:54
'악당에 대해서 새로운 정보를 알아냈어요. 완전 싸이코예요.'
다시 생각해도 전율이군요=_=;;

항상 출격이 늦습니다; 이번주 일요일 기대됩니다 :)
Commented by 산마로 at 2005/06/30 13:27
이 영화에서 진짜 라스 알굴은 듀커드였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와타나베 켄은 그림자 무사라는 거죠.
Commented by 계란소년 at 2005/06/30 13:38
결국 배트맨은 Made in China란 거죠.
Commented by leiness at 2005/06/30 14:29
배트맨 등 밀린 영화는 7월초에 휴가를 받으면 볼려고 계획 중입니다. 심지어 어쩌다보니 스타워즈 에피소드 3도 여태 보질 못해서 말이죠. -_-
Commented by EST_ at 2005/06/30 15:19
렉스// '배트라이트는 삐삐가 아니오'라는 대사가 재미있어서 낄낄거리다가 곧바로 얼어버렸던 순간이었죠. 흐...
이번 주말에 보시는가 봅니다. 아무쪼록 즐거운 관람 되시길.

산마로// 안녕하세요. 충분히 수긍이 가는 말씀이로군요. 그림자 무사라니 와타나베 켄이 굉장히 아깝긴 합니다만...

계란소년// 결국 그 역시 마데전자의 마수를 벗어나진 못한게지요.

leiness// 많이 바쁘셨던 모양입니다. 즐거운 휴가 되시길 바랄께요:D
Commented by marlowe at 2005/06/30 16:39
라스 알굴이나 듀커드 모두 초능력자는 아니니, 다시 나올 것 같지는 않군요.
(적어도 이번에 시작된 시리즈에서는...)
킬리안 머피는 배트맨역을 위한 오디션을 보았다고 합니다.
('스파이더맨'의 제임스 프랑코와 같은 경우군요.)
Commented by 미나세 at 2005/06/30 18:39
베트맨 시리즈는 하나도 본적이...
Commented by 영원제타 at 2005/06/30 22:35
사실, 라스 알굴은 잘 모르는 캐릭터입니다. ^^
Commented by EST_ at 2005/07/01 01:34
marlowe// 라스 알 굴은 어떤 면에선 초자연적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만... 혹 부활시킬 계획이라면 비긴즈에서 만들어진 배트맨의 세계관에 어색하지 않도록 꽤 궁리를 해야 할 듯 하군요.
킬리안 머피가 배트맨 오디션을 본 것은 미처 몰랐군요. 배트맨 오디션을 본 이는 스케어크로우가 되고 스파이더맨 오디션을 본 이는 2대 고블린이 된다니 재미있습니다.

미나세// 아앗 이 재미있는 것을 말입니까!? 전 지금까지 중에선 팀 버튼의 <배트맨 리턴즈>가 최고였습니다.

영원제타// 저스티스 리그 포스팅을 계속 하고 계시니 배트맨 TAS도 보셨을거라 생각합니다만, 그렇다면 아마 낯이 익으실 겁니다.
http://www.superman-batman.com/batman/cmp/ras.html <-이사람입니다. 딸인 탈리아는 배트맨을 좋아하죠.
Commented by Loomis at 2005/07/01 02:08
드디어 보셨군요 :-)

EST님의 감상이 상당히 궁금했는데, 보게 되어 기쁩니다. 마천루 꼭대기에 선 배트맨 실루엣은 정말 굉장한 장면이었습니다.
Commented by EST_ at 2005/07/01 09:40
Loomis// 드디어 보았답니다 :D
언제나 편협하고 길기만 감상인데 궁금했다 하시니 쑥스럽군요. 너무 즐겁게 봐서 재관람을 생각하곤 있습니다만 7월 초순까지 이것저것 일들이 줄을 서 있어서 어찌될 지는 모르겠네요. 마천루 실루엣 장면은 뭐랄까 허를 찔린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걸 극장에서 보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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